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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도위령당 관동 대지진과 도쿄 대공습 희생자를 추모하는 도쿄도위령당. 일본 정부와 도쿄도는 이곳에서 매년 공식 추모 행사를 갖는다.
ⓒ 임병식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横網町) 공원을 찾은 9월 26일 오전, 가을비가 내렸다. 낮게 깔린 비구름 아래 녹색 지붕을 인 도쿄도 위령당은 고요했다. 이곳은 관동대지진과 도쿄대공습으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곳이다. '위령당(慰靈堂)' 현판 아래에서는 미국인 관광객들이 일본인 해설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 1923년 관동대지진의 참상일까, 1945년 도쿄대공습의 비극일까. 이날 해설은 일본 시민들이 겪은 피해에 초。이 맞춰져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곳에서 일본이 피해자가 된 역사는 기억되지만, 가해자가 된 역사는 얼마나 이야기되고 있을까.
요코아미초 공원에는 일본 근현대사의 비극이 겹쳐 있다. 관동대지진과 도쿄대공습은 도쿄를 폐허로 만들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일본 시민들에게 두 사건은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다. 국가가 공식 추모행사를 열고 희생자를 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공원에는 또 다른 죽음을 기억해야 할 장소가 있다.
▲ 관동 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도쿄도위령당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희생자를 기리는 추도비가 서 있다.
ⓒ 임병식
위령당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있다. 우산을 든 한 여성이 빗물에 젖은 추도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도비는 말이 없고, 발길을 멈추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일본 사회가 가해 역사까지 함께 기억하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지진과 전쟁이 앗아간 생명도, 민족적 증오 속에 살해된 생명도 무게는 같다.. 그러나 자연재해로 숨진 것과 특정 민족을 겨냥한 국가 폭력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 두 죽음을 추모하는 것과 죽음의 성격을 구분해야 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100년 전 학살, 오늘의 기억
관동 대지진 직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방화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조선인을 향한 적대감은 자경단의 폭력으로 번졌고, 수많은 조선인이 살해됐다. 군과 경찰의 개입 정황도 적지 않다. 당시 유언비어가 어떻게 확산했고, 공권력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규명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2017년부터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 도지사 명의 추도문을 보내지 않고 있다. 모든 희생자를 추도하고 있기에 별도 추도문을 보낼 필요가 없다는 취지다. 그러나 '포괄적 추도'는 책임 회피다. 자연재해로 숨진 사람과 민족적 편견 속에서 살해된 사람을 같은 범주에 넣는 것은 책임을 흐리는 일이다.
왜 그런 참극이 있었고, 누가 폭력을 행사했으는지, 공권력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규명하는 건 국가의 몫이다. 추모는 과거를 덮는 방식이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이어야 한다.
위령당 옆 부흥기념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미군 폭격으로 무너진 도시와 폐허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담은 사진으로 빼곡했다. 도쿄 대공습으로 시민들이 희생됐음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전쟁과 참상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다만 그 기억이 성찰로 이어지지 않고 선택적으로 기억한다면 공감하기 어렵다.
강변에 남은 시민들의 기억
▲ 호센카의 집 내부 호센카의 집 벽면에는 조선인 집단 학살 정황을 증언하는 자료와 생존자 증언을 기록한 글로 빼곡하다
ⓒ 임병식
며칠 전 찾았던 아라카와 강변의 '호센카(봉선화)의 집'은 이런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곳은 교사 출신 일본인 활동가와 시민들이 조선인 학살을 알리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마련한 자료관이다. 도쿄도 위령당은 공공기관이 관리하는 추모 공간이라면, 호센카의 집은 시민들의 자원봉사로 기억을 지키는 곳이다.
자료관에서 학살 현장까지는 30m 남짓이다. 지금은 평온한 강물이 흐르고 산책로가 이어지지만, 100여 년 전 이 일대에서 조선인들은 집단 살해됐다. 현장을 안내한 아베 준이치로 씨는 "당시 화재를 피해 강둑으로 대피한 사람들 가운데 경찰과 자경단이 조선인만 골라내 학살했다"고 설명했다. 자료관 벽면은 이런 정황을 뒷받침하는 증언들로 가득했다.
▲ 호센카의 집 텃밭에 서 있는 관동 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집단 학살을 알리고 유골을 발굴하는 시민단체가 세운 호센카의 집 텃밭에 서 있는 관동 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 임병식
텃밭에는 '추도'라고 새긴 돌비가 서 있다. 기념비는 "일본 군대와 경찰, 유언비어를 믿은 자경단에 의해 수많은 조선인이 살해됐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과거를 반성하며 두 민족의 화해와 친선, 인권 회복을 기원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준이치로씨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퇴근한 뒤 호센카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그와 같은 시민들이 한둘 아니다. 정부 지원을 받는 기관도 아닌데 누군가는 생업을 마친 뒤 100년 전 조선인의 죽음을 기억한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역사 인식에 분노하면서도, 이런 시민들을 보면 복잡한 생각이 든다. 국가와 시민을 하나로 묶어 판단할 수는 없다는 걸 새삼 확인한다.
역사를 마주하는 또 다른 목소리
일본 정부는 2017년 국회 답변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기록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지 사실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일본 정부가 기록을 수집하고, 문서와 증언을 검토하며, 희생과 책임의 실체를 밝히려는 노력은 당연하다. 진상 규명은 불편하다는 이유로 멈출 수 없다.
일본 정치인 중 과거를 직시하려는 목소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와 자민당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는 조선인 학살을 기억하고 관련 역사에 대한 조사와 대응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이들은 일본 사회가 단일한 목소리로만 구성돼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위령당 앞 미국인 관광객 도쿄도위령당 앞에서 일본인 해설사로부터 피해자로서 일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미국인 단체 관광객. 해설사는 피해자로서 일본을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 임병식
위령당 앞에서 만난 미국인 관광객들을 다시 떠올린다. 그들이 어떤 설명을 듣고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에서 가해의 역사도 함께 마주했을지다. 일본이 자신들의 피해를 기억하는 것과 이웃 민족에게 가한 폭력을 함께 기억할 때 역사는 온전해진다.
도쿄도 위령당과 호센카의 집의 차이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말하며, 어떤 책임을 묻는지에 있다. 대지진으로부터 100여 년이 흘렀다. 시간은 흘렀다고 해서 역사는 저절로 정리되지는 않는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가 있을 때 진정한 화해는 시작된다. 아라카와 강을 바라보며 그런 바람을 품었다.
▲ 아라카와 강과 학살 현장 아베 준이치로씨 안내로 아라카와 강변에서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집단 학살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학살 현장을 돌아봤다.
ⓒ 임병식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국가유산청 국가유산위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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