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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4월 일본군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는 부산 주재 총영사 무로타 요시부미(室田義文)에게 비밀 임무를 의뢰했다. 가와카미는 일본의 첩보와 정보수집, 비밀공작 전문가였다. 육군을 세계 수준으로 발전시키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조선침략을 실질적으로 총괄기획했다. 가와카미는 무로타에게 훗날 전쟁을 대비하여 조선에 미리 철도를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때마침 일본 각계에서 한반도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종단철도 건설론이 등장한 터였다. 직접적인 계기는 러시아의 동진이었다. 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영국과 사사건건 충돌했던 러시아는 1885년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7,400㎞의 시베리아횡단철도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 1891년에 철도 건설을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1888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군사의견서」에서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병력을 수송하게 되면 조선을 침략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등 러시아에 대한 대응론이 계속 대두됐다.
무로타 부산 총영사는 철도국장관이 추천한 철도기사 고노 텐즈이(河野天瑞)로 하여금 노선을 답사하도록 했다. 고노는 서울-안성-진천-청주-보은-상주-삼랑진-부산에 이르는 384km 노선을 제시했다. 이 첫 번째 답사 노선의 핵심은 소백산맥 통과였는데 상주-문경-충주에 이르는 조령(새재)의 험준함을 고려하여 상주-문의 노선을 채택했다. 무로타는 보고서를 참모본부와 외무성 등에 제출했다.
경부선 추진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1892년 고종은 미국인 모스에게 경부철도 부설권을 줬다. 모스가 철도를 개설하는 대신, 25년 동안의 철도운영권과 5개의 금광 채굴권을 주기로 했다. 그러나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의 반대로 무산되자 모스는 1만원의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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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조선의 철도 건설에 관심이 높았고, 1894년 7월 청일전쟁을 빌미로 한반도에 군대를 보내 왕궁을 장악하고 친일내각을 구성,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8월에는 경복궁에서 일본군 철수를 조건으로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 경부·경인철도 건설의 단초를 확보했다.
경부선 2차 노선 답사는 청일전쟁이 진행 중인 1894년 11월에 이뤄졌다. 사이고 쓰구미치 육군대신은 체신성 철도기사 센고쿠 미츠기(仙石貢) 일행을 파견했다. 사이고는 군대를 동원하여 답사반에게 호위와 경비, 식량 및 금전 등을 지원했다. 센고쿠는 청주-문의-옥천-영동-황간-인동-대구에 이르는 노선을 제시했다. 조령 대신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추풍령을 통과하는 안을 내놓은 것이다.
당시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을 하면서 부산-대구-상주-문경-충주-서울 노선으로 실제 병참선을 운영해봤다. 그러나 탄약과 보급품을 실은 수레가 조령을 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길도 좁은 데다 산세가 험해, 병력의 이동이 지체되고 인부들이 도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조령을 통과하는 노선을 배제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3차 답사는 1898년 대한제국과 일본이 경부선 부설권을 확보한 경부철도합동계약을 체결하면서 이뤄졌다. 합동조약 발기위원인 오에 타쿠(大江卓)와 기사 구노 도모요시(久野知義)가 3-5월 50여일 간 현장을 답사했다. 이들은 수원-평택-공주-논산-금산-영동-김천-성주-현풍-창녕-여산-삼랑진-부산에 이르는 471km의 노선을 제시했다. 토지가 비옥하고 농업생산이 풍부한 충남과 호남을 고려한 노선이었다.
4번째 답사는 1900년 경부철도 창립위원회의 지시로 카사이 아이지로(笠井愛次郞) 기사장이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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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단은 기존의 노선을 종합하여 서울-수원-평택-천안-조치원-대전-영동-황간-김천-대구-삼랑진-부산에 이르는 현재의 노선을 내놓는다. 공주-논산-금산-영동 구간은 금강 하류에 긴 교량이 필요하고, 논산-영동 구간에 터널과 난공사가 많아 배제했다. 전의-영동 직결 노선은 금강 상류를 2번 건너야 하지만 긴 교량에 비해 공사비가 적게 들고 공주로 우회하는데 비해 37km가 단축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전의-영동 직결 노선이 채택됨으로서 중간에 조치원-대전-옥천역이 들어서는 계기가 마련됐다. 영남에서는 대구-청도-삼랑진-부산의 평지선이 채택됐다. 경제적 군사적 시간적(공기) 측면을 고려하여 직결 노선으로 확정한 것이다.
일제(경부철도회사)는 경부철도합동계약을 바탕으로 경부선 건설을 밀어붙였다. 이 계약으로 일제는 경부철도 부설과 운영에 관한 배타적인 권리를 확보했다.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하고, 대륙(중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식민지 철도 건설을 시작한 것이다.
일제는 대한제국이 철도용지를 무상제공하기로 한 경부철도합동계약을 근거로 1개역당 부지 평균 20만평, 선로용지는 폭 24m를 요구했다. 일제와 대한제국은 수차례 교섭 끝에 남대문 정거장(서울역) 5만1819평, 영등포역은 4만1000평, 부산진역 부지는 3만평, 기타 군소 역 부지는 3만평으로 확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경부선에 편입된 토지는 23개 군, 지주 1만여명, 토지면적 269만7000여 평, 보상비는 45만6700여 원이었다.
일제는 러일전쟁을 의식하여 경부선 건설을 서둘렀다. 1901년 8월 20일 서울 영등포에서, 9월 21일 부산 초량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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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도 주변 주민들의 저항과 반발이 심했고, 부지 매입을 둘러싼 분쟁도 끊이지 않았다. 남대문 근처에서는 정당한 땅값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1902년 말까지 북부 쪽은 영등포-평택 51.5㎞, 남부는 초량-삼랑진 53.1㎞를 건설하는 데 그쳤다. 일제는 러일전쟁이 가시화되자 공사 진행의 속도를 높였다. 그 결과 1904년 11월 준공돼 1905년 5월부터 운행이 개시됐다. 5월 25일에 서울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 광장에서 개통식이 열렸다.
허허벌판이던 대전에도 경부선 간이역이 설치됐다. 일제가 왜 대전에 역을 설치했는 지는 명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호남선 분기를 염두에 두고 대전에 역을 설치했다고 하지만 호남선은 훨씬 뒤에 건설됐고, 당시 분기역으로는 조치원이 더 유력했다. 철도 전문가들은 조치원과 영동(김천)의 중간에 급수(給水)와 급탄(給炭)을 위해 역을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증기관차는 30-40km마다 중간에 정차하여 물과 석탄을 공급받아야 했다. 이 때문에 대전에 간이역을 설치했고, 도시가 커지고 .차 기능이 확대되면서 거.역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실제 1904년 6월 대전에 현재의 대전역보다 400m 정도 남쪽, 역전시장 주차장 쪽 대동에 최초로 소박한 목조 간이역이 들어섰다. 그해 11월 경부선이 완공됐고, 1905년 1월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대전역도 영업을 시작했다. 초기 대전역은 하루 이용객이 100명이 채 안되는 시골역에 불과했다. 인근의 대동천이 자주 범람, 침수피해가 발생했고, 1918년 현재의 위치에 새로 역사를 지어 이사했다.
당초 경부선이 관찰사가 있는 충남의 수부 도시 공주를 통과하려 했으나 유림들이 풍수지리를 이유로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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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보고서에 나온 것처럼 폭이 넓은 금강을 건너는 장대교(長大橋)와 공주-논산-금산-영동을 통과하는 터널 건설 비용이 큰 부담이 됐다.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오로지 최단거리, 최소비용, 최단공기를 고려하여 노선을 결정한 것이다.
대전에서 살았던 언론인이자 실업인이었던 다나카 레이스이(田中麗水)는 초기 대전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그가 1921년에 펴낸 「충남산업지」에 "대전은 1904년 일-러전쟁 당시 경부철도가 조성될 때 내지인(일본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지금 시가지는 잡초가 무성했던 들판과 강변을 매립한 것이다. 그저 황무한 평야로 10리 안에 내지인 집 하나가 겨우 보이는 삭막한 일개 한촌에 불과했는데. 경부선 정차장이 설치되자 지명을 '대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적었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쓴 글이지만 대전이 한적한 농촌이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일본인들은 대전역 주변의 좁은 공간에 집과 상가를 짓고 정착했으며, 학교와 관공서와 학교도 하나 둘 들어섰다. 1904년 188명에 불과했던 일본인은 이듬해에는 829명, 10년 뒤인 1914년에는 4900여명으로 급증했다. 일제가 건설한 식민지 도시는 첫째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완전히 새롭게 형성된 도시, 둘째 기존 전통도시에 겹쳐진 도시, 셋째 기존 대도시 인근에 형성된 도시 등 3개 유형으로 분류된다. 대전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첫 번째 유형에 해당하는, 일본인에 의해 시작되고 성장한 도시였다.
일본인들에게 대전은 기회의 땅이었다. 한적한 시골에 역이 들어섰고, 주변에 개발 가능한 토지가 널려있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철도의 위력을 십분 체험하고, 인지하고 있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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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본토의 철도역 주변에는 예외 없이 사람이 몰리고 상권이 형성되고, 관공서도 들어섰다. 장사가 잘되니 돈도 몰리고 땅값과 집값도 올랐다. 더구나 대전역 주변은 기존의 주택이나 상가, 관공서가 없었으며, 땅도 싸게 확보할 수 있었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는 「어둠의 심연」이란 작품에서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해 모험가, 야망가, 금광을 노리는 사기꾼, 사업 실패자, 노동자 등 온갖 인간 군상이 모여든다고 적고 있다. 조선의 신흥 지방도시인 대전도 마찬가지였다.
다나카 레이스이가 편찬한 「조선대전발전지」에는 1916년 당시 대전 거주 일본인의 직업이 나열돼 있다. 직업의 종류가 미곡상, 문방구, 음료수제조, 인쇄업, 토목직, 교사, 과자상, 잡화상, 무역상, 주류상, 운송업, 철물상, 은행원, 하숙업, 양복상, 산파, 대금업 등 237개에 이른다. 조선의 기존의 공주, 홍성, 충주, 등과 전혀 다른 성격의 근대 도시가 형성된 것이다. 종사자가 가장 많은 직업은 노동 및 기타(220명)와 철도종업원(169명)이었으며 목수, 공부(工夫 공장노동자), 예기(藝妓), 작부(酌婦), 우편국직원, 회사원, 행상, 날품팔이 종사자가 각각 20명 선을 넘었다.
대전역 주변의 신도시에 거주하는 일본인 4360명의 출신지도 흥미롭다. 출신지를 일본의 부(府)와 현(縣) 별로 파악한 결과 후쿠오카 출신이 506명으로 11.6%나 차지했고, 구마모토, 나가사키, 히로시마, 야마구치, 오이타, 오카야마, 시가, 사가 출신도 각각 100여 명을 넘었다. 시모노세키항에서 부산을 거쳐 관부연락선을 타고 한반도에 건너오기 용이한 규슈와 주고쿠 출신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 것이다. 이들은 대전역 주변에 모여 살며 거류민 조직을 구성하여 도시의 몸집 키우기에 나섰다. 현해탄을 건너며 품고 온 욕망의 그물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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