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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사고로 대학원 중단
외국 유학을 꿈꾸며 세부적 계획을 세우던 나는 실로 뜻밖의 사고로 대학원을 중단했다. 내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남들은 쉽게 '실연'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내겐 온 우주가 무너지는 대참사였다. 어머니의 내몰린 미국 이주와 아버지의 때이른 죽음도 결과적으로 내 비극을 심화시켰다. 몇 차례나 죽음의 문턱에 다가서기도 했다. 그 혼돈과 절망의 세월을 촉발한 사건이 국가 공부(公簿)에 남아 40여 년 후에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70년 인생 전체가 도매금으로 재단되어 파렴치한 인간의 낙인이 찍혔다. 나를 신뢰하여 기대를 걸었던 분들께는 진한 아쉬움을 남겼고, 늦게 이룬 가족에게도 힘든 짐을 지웠다. 그 누구를 원망하기에 앞서 내 스스로 자초한 운명적 비극으로 달게 받아야 할 것이다. 한 친척 어른은 옛 조상의 유훈을 어기고 정치에 발을 들이민 죄라고 규정했다. 그 겨울의 잔혹한 사건은 끝내 나의 대학원 중퇴로 이어지면서 헌법도 저항권도 아득한 세계로 밀려났다.
정신과 의사 황토마스 선생님
"근년에 작고하신 토마스 황 선생님께서 주신 인도와 격려는 나의 은밀한 행운이었다."
《안경환,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 라이프맵, 2016, Epilogue, 주1, 422쪽》
2016년에야 나는 그 시절 나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정신과 의사의 이름을 밝혔다. '은밀한'은 그분이 내게 내린 처방의 일부였다. 누구에게도 내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사실을 감추어야 한다는 당부였다. 황덕준 선생님(1938-2007)을 처음 만난 것은 1968년경, 선생님이 혜화동 언덕배기 '베드루신경정신과의원'의 전공의로 입원환자인 내 동생을 살피던 시절의 일이다. 동생 보호자 자격으로 만난 나는 7년 후에는 환자 신분으로 그분 스스로 운영하는 작은 병원에 두 차례 입원 가료를 받았다. 선생은 심신이 피폐한 몰골로 실려온 나를 며칠 내내 잠만 재웠다. 그리고선 몇 차례의 심층 대담을 거쳐 내게 '삶의 구체성'을 찾으라는 처방을 내렸다. 처방에 앞서 그는 내게 확신을 심어 주었다. 동생의 '병'과 나의 '증상'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동생의 병이 선천적인 신경조직의 문제라면 내 증상은 마음의 문제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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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스스로 다스려야만 한다. 선생은 차근차근 나로 하여금 자기분석(self-analysis)을 유도해 냈다. 저항권이니 사랑이니 의리니 하는 등속의 추상적인 가치에 매몰된 나머지 서른이 되도록 엄정한 삶의 현장에서 도피한 것이 원인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그러니 우선은 생존의 현장에 몸을 담아 건강한 심신을 다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도 속말로 '연대가 맞아야' 하는 법이라고 한다. 2010년 즈음 한창 매스컴을 타던 한 씩씩한 여교수가 젊은 시절에 토마스 선생의 도움받은 사실을 자신의 책에서 밝혔다. 그나 나나 제때 선생을 만난 것은 지극한 행운이었다.
당신은 기업 체질이 아니야!
황 선생님의 권유와 주선으로 나는 작은 무역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기업 생활은 내게 세상살이를 가르쳐 주었다. 기업은 탐욕의 시장이다, 회사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악덕 자본가의 소굴이다. 설익은 이념적 사춘기의 도그마에 갇혀 있던 내가 '수출입국' '경제성장'의 구호가 일상을 지배하는 산업 현장에 발을 딛고 대기업 주도의 산업화 윤리에 심신을 조응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매월 제때 월급이 나올지 걱정하는 중소기업 사원들의 모습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하청공장의 열악한 사정과 심각한 노동 착취를 모를 바도 아니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1970년 늦가을 전태일 분신 사건의 사회적 의미를 깡그리 잊고 지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출한국' '경제입국'의 구호에 혼을 앗긴 일상이었다. 이른바 '후진국' 나들이가 쌓이면서 더욱 더 '선(先)성장, 후(後)배분'의 경세철학을 신봉하게 되었다.
실로 바쁘게 일했다. 적지 않은 책임이 따르는 대기업 중견간부로 승급, 전직한 후로는 더욱 그러했다. 아침 7시 출근이 원칙이었고 퇴근 시간이 따로 없었다. 주말도 없고 해외 출장도 다반사였다. '업무상' 술자리도 허다했고 관례에 따라 정부 관리나 금융계 인사에게 적절한 '인사'도 건네야 했다. 때로는 중요한 해외 고객의 '밤자리'도 주선해야 했다. 이 모든 비리가 수출 한국의 전위대에게 부과된 역사적 책무라고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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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생존이 나라의 발전과 직결되어 있다. 그래서 회사를 위하는 것이 곧바로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기업관을 신봉하는 무리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차 근본적인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가까운 장래에 내가 올라갈 뒷자리를 곁눈질해 보니 말로가 보이는 듯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약간의 부정을 저지를 수 있는 여유와 배포가 있는 사람이라야만 회사를 위해 더 큰 부정을 저지를 수 있다. 그 사소한 부정은 오히려 사회 발전의 윤활유가 된다고 믿어야 한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런 윤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체질화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기업에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관청리(貪官淸吏)'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자리는 탐내되 청렴하게 살라. 일을 도모하려면 그 자리에 올라야 한다. 공자님 말씀이다. 그러나 기업에서는 열심히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는 고위직에 오르기 어렵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융통성 없는 '고지식'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중요한 자리에 등용되지 않는다. 모든 인맥을 동원하고 갖은 수단을 써서라도 회사가 추구하는 이윤 극대화에 헌신해야만 한다.
되돌아보면 만약 내가 기업 생활을 계속했더라면 필시 도중에 퇴출당했을 것이다. 설령 그 이전투구에서 살아남아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 올랐더라도 종국에는 감옥행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재직 중에 과로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재벌 대기업에서 나는 신규 사업 개발과장 비슷한 직책을 맡았다. 국내에서 이미 사양산업이 된 계열사 회사를 정리하여 설비를 동남아로 옮길 궁리를 했다. '플랜트(Plant) 수출'이라는 형식의 수출이다. 현지에 합작회사(Joint Venture Company)를 새로 설립하고 그 신규회사가 폐쇄되는 기존 공장의 기계 설비를 인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상급자들은 공장의 낡은 기계를 신품으로 위장하여 현지 동업자에게 덤터기를 씌울 요량이었다. 게다가 수출 실적을 기준으로 정부 지원의 범위와 내용이 결정되기에 실적을 높이기 위해 신품으로 가장하는 편법을 쓰자는 것이었다. 나는 강하게 반대했다. 그건 상도의가 아니다. 그리고 이내 탄로 날 부정행위다. 그러나 나의 상도의 강론은 통하지 않았다. 상급자들은 내가 '기업 체질'이 아니라면서 절박한 현실을 환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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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내세우는 '기업 체질' 그것은 한마디로 부정의 체질화였다.
회사는 법인이다. '법인(法人)'은 '법'으로 만든 '사람(人)'이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가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속말이 있다. 회사가 파산 위기에 닥치면 미리 재산을 빼돌리는 기업가의 수완이 칭찬받기도 한다. 나는 이런 기업윤리를 체화(體化)할 수가 없었다.
나는 회사가 이런 흉계를 꾸민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귀띔해 주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 아닌가! 상급자들은 나를 회사기밀을 누설한 배신자로 규정했다. 이 사건은 내게 회사를 떠날 결심을 더욱 강하게 굳혀주었다. 그 인도네시아 기업가와의 인연은 내가 회사를 떠난 후에도 이어졌다. 2001년 나는 새로 내는 칼럼집을 '오랜 친구 Danny Soetanto'에게 바쳤다. (《안경환의 문화 읽기: 사랑과 사상의 거리 재기》 철학과 사상사, 2003. 그는 2023년 10월 14일 타계했다. 자카르타의 빈소에는 내 이름의 조화가 진열되었다)
그는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오래 버텼다.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릴 때는 자신을 속이려 했던 바로 그 기업 출신 직원들을 널리 고용하여 보살펴 주었다. 여러 차례 내 가족과 지인을 초청하여 옛정을 나누기도 했다. 그가 만년에 영락한 몸으로 세상을 작별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내가 인권이라는 '기업 체질이 아닌' 일에 종사하는 사실을 그는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 역시 타고난 기업인 체질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회사를 떠난 이듬해에 한 중역이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 북한에 살고 있는 친척을 만난 사실을 공안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혐의였다. 그는 대학 시절 학생회 리더로 활약했다고 한다. 회사는 즉시 그를 해고했고 오랫동안 그가 쌓은 공로는 깡그리 무시되고, 최소한의 인도적 배려마저 거절했다. 동료와 부하 직원들도 그의 불행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권력 앞에 대기업의 임원도 이처럼 무력한 존재인가, 세상 인심이 이토록 비정한가, 미국에서 그 소식을 듣고서는 나는 회사를 떠나기를 잘했다는 안도의 숨을 내쉬기까지 했다.
1980년 초여름 나는 만학의 길에 나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떠나기 직전에 광주의 참사가 발생했다.
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길에 나서 미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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