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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전용이냐, 한자 병기냐. 내가 1980년대 대학생 시절부터 지켜본 논쟁이다. 그때도 한글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과 한자를 알아야 우리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1948년 한글전용법 제정 이후 이어진 논쟁은 1970년 초등학교 교과서의 한자 표기 폐지, 2010년대 한자 병기 추진 논란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양측의 대립 구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최근 국가교육위원회에서 초등학교 교과서의 한자 표기 문제가 다시 논의되면서 해묵은 갈등이 되살아날 조짐이다.
관련 기사 : [단독] 초등교과서 한자 표기 본격화..."제2의 한자병기 사태"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그동안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손바닥만 한 전화기로 세계의 지식을 찾아보고, 인공지능이 어려운 글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 주는 시대다. 그런데 정작 어린이의 문해력을 걱정한다는 어른들은 수십 년 전의 논쟁을 다시 꺼내 들고 있다. 자동차가 달리는 시대에 마차 바퀴를 어떻게 고칠 것인지만 놓고 다투는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이제는 질문부터 바꿔야 한다. 한글이 이기는 것이 중요한가, 한자가 이기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우리 어린이들이 글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가.
문해력이 목적이라면 한글과 한자는 수단일 뿐
▲ 한글 전용도, 한자 병기도 어린이의 문해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라는 。을 생각해야 한다.
ⓒ kimibmoon on Unsplash
한글 전용론자와 한자 병기론자는 서로 다른 길을 주장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지는 같다. 어린이들이 풍부한 어휘력을 갖추고 글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자는 것이다. 같은 산의 정상에 오르겠다면서 서로 자기 길만 옳다고 다투는 셈이다.
한자 병기 찬성론자들의 주장에는 귀담아들을 대목이 있다. 우리말 어휘의 상당수가 한자어이기 때문이다. '학교(學校)', '학생(學生)', '학습(學習)'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학(學)'이 배움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면 관련 단어의 의미를 연결해 이해하기 쉽다. 한자에 대한 지식은 낯선 어휘의 뜻을 짐작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글 전용론자들의 우려 역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교과서에 한자가 들어가는 순간 어린이들이 외워야 할 글자가 늘어나고, 학부모들은 한자 학원부터 알아보게 될지 모른다. 문해력을 높이려다가 학습 부담만 늘리고 사교육 경쟁을 부추길 가능성도 있다.
어느 한쪽의 주장을 무조건 틀렸다고 할 수 없는 이유다. 다만 양측이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한글 전용도, 한자 병기도 어린이의 문해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라는 。이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지, 반드시 어느 한 길만 고집할 이유는 없다. 더 나은 길이 열렸다면 함께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다.
문해력 부족의 원인부터 제대로 찾아야
어린이의 문해력 부족을 한자 지식의 부족과 동일시해서는 곤란하다.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단어의 뜻을 모를 수도 있고, 문장 구조가 복잡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앞뒤 문장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배경지식이 부족할 수도 있다.
가령 '가뭄이 계속되면서 농작물 생산량이 감소했고, 그 결과 농산물 가격이 상승했다'는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다고 하자. 그 학생에게 '감소(減少)'와 '상승(上昇)'의 한자를 알려주면 문제가 해결될까. 단어의 뜻을 몰랐다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가뭄 때문에 생산량이 줄고,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가격이 오르는 인과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한자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때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면 학생이 어디에서 막히는지 살펴보고 필요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한자어의 뜻을 모르는 학생에게는 어휘의 의미와 유래를 설명하고, 문장 구조가 어려운 학생에게는 문장을 나누어 풀이해 주는 식이다. 다만 이러한 학습 지원은 교사의 지도와 검토를 전제로 해야 한다.
의사가 증상만 보고 무조건 같은 약을 처방하지 않듯, 교육도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부터 찾아야 한다. 모든 어린이에게 똑같은 공부 방법을 강요할 이유가 없다.
인공지능 활용... 교실서 해답을 찾자
한글 전용과 한자 병기를 둘러싼 해묵은 갈등을 풀기 위해 거창한 교육개혁부터 추진할 필요는 없다. 우선 몇몇 초등학교에서 교사의 지도 아래 작은 실험을 시작해 보자. 이미 사용 중인 교과서와 수업을 유지하면서 어려운 어휘를 설명하는 방법만 달리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4~6학년 국어·사회·과학 교과서에서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단어 100개를 선정한다. '감소', '증가', '원인', '결과', '증발', '순환'처럼 여러 교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휘가 적합하다.
그다음 교사들이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세 종류의 학습자료를 만든다. 첫째는 쉬운 우리말로 뜻을 풀어주는 자료, 둘째는 우리말 풀이에 한자와 글자의 의미를 덧붙인 자료, 셋째는 학생의 수준에 맞춰 예문과 그림, 질문을 추가한 맞춤형 자료다.
여기서 중요한 .은 어린이들에게 인공지능을 무조건 사용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교사가 이를 활용해 설명자료를 만들고, 내용의 정확성과 적절성을 검토한 뒤 수업에 적용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잘못된 정보나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를 줄이면서 교사의 수업 준비 부담도 덜 수 있다.
시범수업 전후에 어휘 이해도와 독해력을 평가하고, 일정 시간이 지난 뒤에도 학습 효과가 유지되는지 확인한다. 같은 내용을 배우되 설명 방식만 달리한 집단을 비교하면 한자 정보가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 쉬운 우리말 풀이만으로 충분한지 살펴볼 수 있다. 맞춤형 설명의 효과는 별도로 검증해야 한다.
무엇보다 한글 전용론자와 한자 병기론자가 실험 설계부터 평가까지 함께 참여하도록 하자. 결과가 어느 한쪽의 예상과 다르게 나오더라도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이 필요하다. 인공지능은 자료 제작과 분석을 돕는 도구일 뿐, 결론을 미리 정해 주는 심판이 아니다.
상대방 주장부터 공정하게 이해하자
시범사업에서 효과가 확인되면 교육청 단위로 확대하고, 효과가 미미하거나 학습 부담이 커진다면 방법을 수정하면 된다. 교과서를 전국적으로 바꾸는 일보다 비용과 혼란을 줄일 수 있고, 정책 실패의 위험도 낮출 수 있다. 말로는 수십 년을 다투었지만, 이제는 교실에서 근거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교육 방법을 검증하는 일과 함께 대화 방식도 바꿔야 한다. 국가교육위원회가 양측의 주장과 근거, 우려 사항을 공개적으로 정리하고, 인공지능을 활용해 쟁.별 공통.과 차이.을 비교하는 것이다. 다만 기계가 만든 요약은 반드시 당사자들이 검토하고 수정하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특별한 협상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한자 병기 찬성론자는 한글 전용론자의 우려를 자신의 말로 설명하고, 한글 전용론자는 한자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공정하게 소개해 보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인정할 때 비로소 절충안을 논의하는 것이다.
서로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상대방의 논리를 대신 설명해 보는 것이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한다고 반드시 상대방의 주장에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무엇을 걱정하고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알아야 타협의 실마리도 찾을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신념이 공격받는다고 느끼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다. 따라서 협상에 앞서 자신의 감정과 선입견을 돌아볼 필요도 있다. 새로운 기술은 이러한 성찰과 대화를 돕는 거울이 될 수 있다. 다만 기계가 내놓은 분석을 정답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최종적인 판단과 책임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몫이다.
양보를 패배로 여기지 않아야 합의 가능
오래된 논쟁이 좀처럼 끝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주장이 신념이 되고, 신념이 자존심이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린이 교육을 위해 시작한 논쟁이 어느새 자신의 주장을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바뀌기 쉽다.
수십 년 동안 한글 전용을 주장해 온 사람에게 한자의 교육적 활용 가능성을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한자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해 온 사람에게 한자 없이도 어휘력을 높일 수 있는 교육 방법을 인정하는 일 역시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근거 앞에서 생각을 바꾸는 것은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수정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합리적인 사람이다. 교육정책에서 지켜야 할 것은 개인의 체면이 아니라 어린이의 배울 권리다.
국가교육위원회는 양측이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면서도 실질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한글 중심 교육을 유지하되 한자 정보의 선택적 활용 가능성을 검증하고, 한자 암기나 쓰기 시험을 의무화하지 않는 방안도 논의할 수 있다.
교과서를 당장 바꾸기보다 보충학습부터 시범 운영하는 것도 현실적인 방법이다. 학생이 어려운 단어를 선택하면 쉬운 뜻풀이와 예문을 보여주고, 필요할 때 한자 정보까지 제공하는 방식이다. 교사의 지도 아래 정확성을 。검하고 개인정보를 보호하며, 디지털 기기 이용 여건에 따른 격차도 살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교과서에 한자를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 결론을 서두르지 않고도 어린이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부터 찾아볼 수 있다. 서로 한 걸음씩 양보해 두 걸음을 앞으로 나아가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자존심 때문에 아이들 시간을 빼앗진 말자
한글 전용 논쟁이 2026년에도 되풀이된다는 사실은 씁쓸하다. 그동안 컴퓨터가 등장하고 인터넷이 세상을 연결했으며, 이제는 인공지능이 지식의 생산과 전달 방식까지 바꾸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린이의 문해력을 높이겠다면서 교과서에 한자를 넣느냐 마느냐는 문제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글은 우리말을 담는 훌륭한 그릇이다. 한자는 우리말의 일부 어휘가 지닌 의미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원이다. 새로운 기술은 이 두 가지를 학생의 필요에 맞게 활용하도록 돕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어느 하나를 무조건 배척하거나 만능으로 떠받들 이유가 없다.
문해력을 높이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라면 이제 논쟁의 방향부터 바꿔야 한다. 한글과 한자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만 매달리지 말고, 어린이들이 어떻게 하면 글을 더 잘 이해하고 깊이 생각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함께 연구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모든 갈등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주장을 비교하고, 새로운 대안을 실험하며, 합의의 가능성을 넓히는 데는 충분히 활용할 가치가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기술에 대한 맹신도, 기존 교육방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고집도 아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열린 마음으로 검증하려는 자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공감신문에도 실립니다.
도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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