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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10-14 18:05 조회 2 댓글 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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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잠든 늦은 밤, 차를 달려 설악산으로 향했다. 늘 아내와 둘이서만 다니던 산행길에 이번에는 딸이 함께했다. 자칭 '집순이'인 우리 딸은 대학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늘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한 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주말에도 웬만해선 밖으로 잘 나가지 않고, 빠르고 복잡한 현실 속에서 평온과 안정을 더 좋아하는, 자기만의 속도로 조용히 살아가는 아이였다. 요즘 말로 하면 이른바 '그랜마 에라Grandma Era'에 가까운 사람이랄까.
그런데 얼마 전부터 주말이면 얼굴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바빠졌다. 늦잠을 즐기던 딸이 아침 일찍부터 나가는 날이 많아졌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혼자 미소 짓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아내에게 물었더니 뜻밖에도 "연애 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적잖이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문득 오래전 아내와 결혼하기 전 장인어른께 전통적 관습 아닌 간섭(?)에 의해 제법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였을까. 딸의 연애 소식을 처음 들은 순간에도 섭섭함이나 경계심보다는, 내 딸을 좋아해 주는 얼굴도 모르는 그 녀석이 괜히 고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사실을 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고, 딸 역시 빨리 소개해 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나 또한 딸을 행복하게 해주는 그 녀석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어온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언젠가 딸이 결혼할 사람을 데려오면 나는 꼭 설악산 정상에서 그 친구를 만나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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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수많은 만남의 장소가 있지만, 우리 부부가 처음 부부의 연을 맺고 신혼여행으로 와서 오른 대청봉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 청춘의 가장 짙은 시간들이 늘 설악산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하게도 딸이 태어나던 날에도 나는 배낭을 메고 산으로 향했고, 첫돌을 맞이하던 날에도 히말라야 원정을 준비하며 암릉 위에서 로프를 잡고 있었다. 그곳이 하필 울산바위 '돌잔치길'이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내 마음 한켠에 묘한 미안함과 빚으로 남아 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우리는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한 채 남설악탐방지원센터를 지나 산길로 들어섰다. 오픈런을 피해 한 시간 늦게 출발한 덕분에 공룡능선을 향한 이른 행렬은 이미 지나가고 없었다. 등산로는 생각보다 조용했고, 숲길에는 느긋한 걸음만 드문드문 이어졌다. 올라갈수록 길은 더 가팔라졌고, 숨소리는 。. 더 거칠어졌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며 한 걸음씩 내디딜수록 어둠은 걷히고,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설악의 장대한 풍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된 부부는 숨이 차고 다리에 힘이 풀려갔지만, 젊고 배기량 좋은 두 사람은 힘든 줄도 모르고 씩씩하게 정상을 향해 걸어갔다.
바람 거센 능선에서 괜한 말들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같은 길을 걷다 보면, 애써 꾸민 모습은 자연스레 벗겨지고 사람은 결국 자기 모습으로 남는다. 어쩌면 내가 산에서 그 녀석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길 위에서 나는 그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대청봉 정상에서 우리는 비로소 정식으로 첫인사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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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오늘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함께 공룡능선도 걷자고 약속했다.
대청봉 정상에서 초여름의 설악은 눈부셨다.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과 푸른 하늘, 멀리 동해까지 보이는 시원한 조망. 아침 햇살을 받은 수목들은 영롱하게 빛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를 이해하기에 충분했고, 무엇보다 처음으로 대청봉에 오른 딸의 얼굴에도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문득 오래전 젊은 날의 나와 아내의 모습도 저 능선 어딘가에 아직 머물러 있는 듯했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고, 사람은 각자의 시간을 지나며 변해가지만, 설악의 바람 속에서는 이상하게도 세월이 천천히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각자의 짝을 찾아가는 아이들은 어느새 자기 삶의 능선을 걷고 있었고, 우리는 이제 그 뒤에서 묵묵히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누군가를 대신해 걸어 줄 수도 없고, 대신 숨 쉬어 줄 수도 없는 산처럼 그들의 삶도 결국 스스로 넘어가야 할 능선일 것이다. 그저 넘어지지 않게 바라봐 주고, 힘들 때 묵묵히 곁에 있어 주는 일. 어쩌면 그것이 우리 부부에게 앞으로 남은 일일 것이다. 결국 사람은 각자의 숨으로 자기 삶의 능선을 넘어가야 하니까.
대청봉의 바람은 여전히 거칠었다. 말을 오래 붙잡아 두지 못하는 그 바람 속에서, 문득 오래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내의 아버지. 내가 처음 '시험'이라 부르기도 민망했던 그 자리. 아마 그분도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설악에서 나는 딸의 짝을 본 것이 아니라, 오래전 한 사람의 마음을 뒤늦게 이해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바란다.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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