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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익의 인생 공간] 밀라노 노포 ‘10 꼬르소 꼬모’
노포(老鋪). 비교적 최근에 유행하기 시작한 이 단어는 을지로의 냉면집이나 종로의 국밥집처럼 오래된 식당을 가리킬 때 쓴다. 그런데 단어의 뜻 그대로, 물건을 파는 ‘상.’ 가운데 노포라 부를 만한 곳은 의외로 많지 않다. 유행이 빛의 속도로 바뀌는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뭔가 또 새로운 것 없나’를 주문처럼 외우며 소비하니까.
그런데 온갖 유행을 선도하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30년을 넘게 버티며 지금도 성업 중인 노포가 있다. ‘10 꼬르소 꼬모(10 Corso Como)’. 뭘 파는 가게냐고 하면, 딱 잘라 말하긴 힘들다. 카페와 식당은 물론 옷 가게와 서。, 갤러리까지 겸한다. 게다가 숨겨진 계단을 올라가면 객실이 단 3개 뿐인 호텔까지 있다는 사실! 최근 이곳에 묵을 기회가 있어 하루를 머물며 관찰해 봤다. 유행에 민감한 상업 공간의 세계에서 10 꼬르소 꼬모가 ‘인생 노포’로 기품있게 나이 들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패션, 예술, 디자인, 요리…. 세상만사 흥미로운 일이라면 무엇이든 능통한 여성이 있었다. 이탈리아판 ‘엘르(Elle)’를 창간하고 ‘보그(Vogue)’의 스페셜 잡지 편집장으로 활약하던 카를라 소차니다. 그녀는 어느 날, 평생 만들어 온 종이 잡지를 바라보다가 엉뚱한 상상을 한다. 이 잡지를 사람들이 직접 걸어 들어갈 수 있는 3차원 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잡지란 뭘까. 화제의 인물이 인쇄된 표지를 넘기면 영감을 주는 예술 전시가 소개되고, 뒤이어 감각적인 패션 화보가 펼쳐진다. 조금 더 넘기면 라이프스타일 기사가, 마지막에는 수다거리를 제공하는 가십난이 이어진다. 서로 연관 없는 기사들이 나열된 듯하지만,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편집자의 뾰족한 관.이 머리에 남는 것. 이것이 잡지의 매력이다.
엄마와 딸 세대 함께 찾으며 30년 성업
그녀는 이 매력을 지면에서 공간으로 옮겨오기로 했다. 밀라노 외곽 꼬르소 꼬모 거리에 있던 버려진 자동차 차고지를 사들인 뒤 갤러리(특집 기사)와 의류 부티크(패션 화보), 서。(라이프스타일 칼럼), 카페(가십난)를 한 건물에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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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만의 예리한 안목으로 큐레이션 된, 말 그대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잡지’가 탄생한 것이다.
필자 역시 독자가 되어 잡지를 넘기듯 공간을 경험해 보기로 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꼬르소 꼬모 거리를 걷다가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식물의 초록 물결이다. 복잡한 거리에서 고요한 정원으로 순간 이동했달까. 건물로 들어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져, 특종을 발견한 잡지사 기자들처럼 스마트폰 카메라부터 꺼내 든다. 이 공간의 표지를 장식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식물’인 셈이다.
첫 번째 특집 기사는 1층 마당에 자리한 야외 카페다. 사방이 정원으로 둘러싸인 중정(中庭) 형태라 어디서든 초록빛 오아시스를 바라보며 커피와 칵테일을 즐길 수 있다. 이 느긋한 풍경에 익숙해질 즈음 자리에서 일어나 1층 옷 가게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10 꼬르소 꼬모만의 깐깐한 기준으로 골라낸 상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마침 한국의 안경 브랜드 ‘젠틀 몬스터’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내심 반가웠다.
올라가는 계단 한편에는 3평 남짓한 작은 전시 공간이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비발디협주곡 ‘사계’ 선율이 박진감 있게 울려 퍼지고, 작가가 전 세계에서 촬영한 누드사진들이 교차하는 영상이 상영되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혁신적인 패션 디자이너이자 사진작가인 크리스찬 보아로의 전시였다. 클래식과 누드라는 상상도 못 한 조합 앞에서, 불과 1초 전까지만 해도 ‘뭐 살 만한 것 없나’ 소비자의 눈으로 공간을 훑던 내가, 순식간에 전위 예술의 관객이 되었다.
이렇게 한 바퀴를 둘러보고 나니 마치 ‘이 시대의 감각적인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엮은 특별호 잡지 한 권을 완독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이곳을 ‘힙스터의 디즈니랜드’라 불렀다는데, 딱 맞는 표현이다. 지적 모험심을 자극하는 다양한 놀이기구를 타고 난 느낌이랄까. 내 손에 든 메모지에는 나중에 찾아볼 예술가와 이곳에서 얻어낸 아이디어 키워드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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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사회학자 프란체스코 모라체는 이 전례 없는 공간을 설명하기 위해 ‘콘셉트 스토어(Concept Store)’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이렇게 살아보는 건 어때’라는 삶의 개념(Concept)을 판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10 꼬르소 꼬모는 어떤 삶의 개념을 팔고 있는 걸까. “최신 유행을 쇼핑하라”일까, “전위 예술을 숭배하라”일까.
필자가 찾은 답은 다음 날 아침 1층 카페에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수트를 차려입은 이탈리아 신사들이 업무 회의를 하고, 옆 테이블에는 밀라노 패션 위크를 맞아 방문한 장신의 모델이 바쁘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한편에는 이들을 흥미롭게 구경하는 한국에서 온 건축가가 있다.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공간이 제안하는 콘셉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종일 수다를 떨고 서로를 바라본다. 커피, 식사, 칵테일까지 시간대별로 메뉴를 바꿔가며 하루 종일 운영되는 공간이기에 가능한 풍경이다.
건축가의 눈으로 보기에 이 공간이 파는 진짜 콘셉트는 다름 아닌 ‘광장(Piazza)의 삶’이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타인을 구경하고, 나 역시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되는 일을 즐기는 이탈리아 특유의 광장 문화, 이른바 ‘보고 보여지기(Vedere e farsi vedere)’를 이 공간이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도시의 광장은 국가나 행정기관이 주도해 만드는 공공재다. 그러다 보니 남녀노소 누구나 공평하게 즐길 수 있도록 최대한 무난하게 조성된다. 누구나 좋아하는 나무를 심고, 쉴 수 있는 벤치를 놓아 그늘을 제공하지만 사실 그 이상의 날카로운 자극은 없다. 반면 10 꼬르소 꼬모는 누군가의 독특한 취향으로 기획된 ‘사적인 광장’이라 부를 수 있다. 덕분에 그 취향을 이해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구경하는 장소가 된다. 다음 날,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며 생각했다. 교과서처럼 반듯한 공공 광장도 좋지만, 관。이 선명한 잡지 같은 ‘사적 광장’도 우리 도시에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다고 이곳이 특정 계층만 머무는 배타적인 공간이란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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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하룻밤 묵은 객실만 보아도 극소수를 위한 럭셔리 호텔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값비싼 마감재와 가구로 치장하는 대신, 손으로 만든 플라스틱 커튼과 하나하나 직접 구운 화장실 타일로 벽을 꾸몄다. 아티스트 크리스 루스가 삐뚤삐뚤 그린 동그란 패턴이 곳곳에 장식되어 있어, 누구나 그 물건이 수제작임을 알아보고 미소 짓게 만든다. 이곳이 30년 넘게 사랑받는 비결은 공간 곳곳에 스며든 ‘손으로 만든 감수성’, 그리고 누구나 좋아할 만한 물건들로 공간을 채웠기 때문이다.
옛 공장 개조 성수동 ‘LCDC 서울’ 닮은꼴
찾아보면 우리 도시에도 이런 사적 광장의 싹이 자라고 있다. 성수동의 ‘LCDC 서울’이 그중 하나다. 방마다 탐나는 상품들이 가득해 문을 열 때마다 잡지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듯 탐험하는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 이곳이 미래의 노포가 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비워 둔 중정이다. 낡은 차고지에서 출발한 10 꼬르소 꼬모처럼, 이곳 역시 자동차 수리。과 공장이 있던 부지 중앙을 비워 사람들이 ‘보고 보일 수 있는’ 광장을 품었다.
노포라고 하면 흔히 쓰러져 가는 간판과 낡은 테이블을 떠올린다. 우리가 그런 공간을 찾아가는 이유는 이 변덕스러운 시대에 시간의 무게를 견뎌 낸 뚝심에 감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밀라노의 10 꼬르소 꼬모는 그 무게가 반드시 과거의 향수에만 기대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지금 이 순간 유행하는 물건과 전위적인 예술을 쉼 없이 소개하는 ‘아방가르드 노포’도 있는 것이다. 30년 전 20대였던 엄마에게도, 지금 20대인 딸에게도 새로운 영감을 주는 패션 잡지처럼 말이다. 이번에는 또 어떤 신선한 자극을 얻어올까. 사람들은 그 기대를 품고 잡지를 정기 구독하듯 이곳을 다시 찾고, 세대를 넘어 공감할 수 있는 대화의 주제를 얻는다. 미래의 추억을 공유하게 만드는 힘, 이것이 유행의 최전선에 있는 상업 공간이 30년 넘게 롱런 하는 비결이다.
조성익 건축가. 홍익대 교수이자 TRU 건축사무소의 대표 건축가다. 맹그로브 숭인 코리빙으로 한국 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공간과 삶, 그리고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책 『건축가의 공간 일기』를 출판했다.
고 보일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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