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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짜 기자’ 유숙열의 옆자리에 김 선배가 발령받아 온 건 1980년 1월이었다. 데스크(기자들의 취재·편집을 지휘하는 직책)를 맡아도 이상하지 않은 선배가 막내급 평기자 자리에 오다니, 아무래도 한국기자협회장 선거 출마를 준비하며 회사에 단단히 찍힌 모양이었다. 쿠데타에 성공하고 기세가 등등한 전두환 신군부에 기자협회는 가장 시끄러운 눈엣가시였다. 정권의 압력을 받던 회사는 김 선배의 출마를 껄끄러워했다.
좌천성 인사였지만 선배는 기가 꺾이기는커녕 특유의 인품과 유머로 주변인들을 사로잡았다. 젊은 후배 기자들을 모아 촌지 거부 운동도 하고 공부 모임도 가졌다. 바깥에서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그해 3월31일, 김태홍 합동통신 기자는 제20대 기자협회장에 당선됐다.
그런 김 선배가 갑자기 도망자 신세가 됐다. 5월17일 밤 12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신군부는 재야인사와 언론인들을 사냥하듯 잡아들였다. 기자협회 부회장이던 고영재 경향신문 기자 등 협회 관계자 7명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김 선배는 급히 피신했다.
아침부터 김 선배의 전화를 받은 유숙열은 약속 장소인 서울 이화여대 앞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선배는 밤 내내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며 잠시 몸을 피할 곳이 없겠냐고 물었다. 김 선배와도 자주 어울리던 친구가 흔쾌히 화실을 내줬다. 독립문 근처 화실은 ‘동지’들이 들락거리며 즐거운 술자리와 진지한 토론을 벌이는 아지트가 됐다.
그렇게 지내길 두 달, 그동안 김 선배의 행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형사들은 약이 바짝 올랐다. 그들은 합동통신 편집국에 매일 찾아왔지만, 말단 기자 유숙열이 기자협회장의 은신처를 수배해 줬다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계속된 헛발질에 화가 난 경찰 상층부가 형사들에게 ‘김태홍을 잡으면 사살해도 좋다’는 지령을 내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어릴 때부터 집에 배달된 신문을 보며 기자를 꿈꿨고, “여자 일이 아니다”라는 친척들의 말에도 포기하지 않은 유숙열이었다. 10·26 사태와 민주화운동 정국을 거치면서 “역사 속에서 나는 뭘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됐지만, 초짜 기자에게는 시대에 참여할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걸려 온 김 선배의 전화가 유숙열은 반갑기까지 했다. ‘수배자의 조력자’, 어지러운 시대 속에 주어진 첫 배역이었다.
피신처가 발각됐다. 김 선배가 도피한 지 두 달째인 7월17일 새벽 계엄당국이 화실을 덮쳤다. 김 선배는 옥상으로 피했지만, 기관원들은 화실 주인 친구를 붙잡은 뒤 그 길로 유숙열의 집까지 찾아왔다. 그들은 유숙열에게 검은 안대를 씌워서 어디론가 데려갔다.
끌려간 곳은 욕조가 있는 어둡고 좁은 방이었다. 수사관들은 김 선배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유숙열이 ‘모른다’고 하자 수사관들은 그의 뒷덜미를 잡고 물이 담긴 욕조에 머리를 박았다. 김대중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덧씌우고 기자협회까지 엮는 게 그들의 그림이었다. 아무리 고문해도 그럴싸한 대답을 얻지 못하자 누군가 말했다.
“남민전 이재문이가 죽은 방으로 가자.”
그들은 유숙열을 남영동 대공분실 5층의 다른 방으로 끌고 가 칠성판에 묶었다. ‘고문기술자’로 불린 이근안이 칠성판에 올라타더니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을 부었다. 사람의 체온을 빼앗는 고문이었다. 7월 한여름에도 몸이 달달달 떨렸다. 다른 방 수사관들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얘 왜 이래? 전기했어?” 유숙열이 식사를 다 게워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수사관들은 의사를 불러왔다. 비밀유지각서를 쓰고 들어온 의사는 링거를 처방하고, 말없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세로로 길게 난 고문실 창밖으로 비가 오고 있었다. 흐린 하늘 아래 우산을 쓰고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여기서 죽어 없어져도 세상은 그대로 돌아가는구나.’ 유숙열은 생각했다. 먹구름 같은 무력감이 마음을 적셨다.
한 달 뒤, 구치소에서 풀려나 보니 회사에서는 이미 잘려 있었다. 유숙열은 남편과 결혼하고 1982년 미국으로 떠났다. 배우고 싶은 게 있었다.
서대문구치소 여성 사동에 있을 때, 유숙열은 여자들이 죄수복을 입게 된 온갖 사연을 들었다. 의처증이 심한 남편이 매일 밤 숫돌에 칼을 갈며 위협하는 탓에 공포에 시달리다가 남편을 독살했다는 죄수의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한국 사회 여자의 삶이란 가지각색으로 지독하고 하나같이 신산했다.
석방된 뒤에는 남편이 구해준 책 <여성해방운동의 이론과 실제>를 읽고 감명받아 여성학을 탐독했다. 유복녀이자 여성으로서 겪어 온 크고 작은 차별이 사회적 맥락 아래 정렬되고, 다른 여성들의 서러운 삶의 가닥들이 그 위로 교차하며 엮였다.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고민의 답이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미국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귀국한 유숙열은 1991년 막 창간된 문화일보에 합류해, 여성주의적 관.의 기사를 적극적으로 썼다. 1997년에는 페미니스트 저널 를 만들었다. 기존 여성잡지들은 요리·패션·육아 이야기만 다뤘고, 여성학 이론서는 사람들이 읽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웃자, 놀자, 뒤집자’라는 표어를 걸고 대중적인 언어로 여성해방을 이야기했다. 꼰대 같은 남성 지식인들을 꼬집고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를 여는, “별걸 다 하는” 나날이었다.
유숙열은 지금도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언론인으로서 저술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역사 속 내 역할’을 찾는 긴 여정의 도착。이 지금의 모습이라면, 출발。은 김 선배의 도피를 도운 일이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를 구하는 게 결국 나를 구하는 일이었죠. 올바른 일을 선택하면서 살게 한 첫 선택이었으니까요. 페미니즘을 발견한 것도 그 연장선에 있고, 오히려 선배에게 고마워요.” 그가 말했다.
1980년 8월, 김 선배는 3개월의 도피 끝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다. 석방되고서도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1986년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 등과 함께 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하며 민주화 시계를 앞당겼다. 정계에 진출해 국회의원을 두 차례 지낸 그는 젊은 날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투병하다 2011년 세상을 떠났다.
◆ ◆ ◆
1980년 5월 광주를 폭력으로 짓밟은 전두환 신군부는 사회를 더 강하게 억압하기 시작했다. 거리에서는 시위를 강경하게 때려잡고, 뒤에서는 재야·민주화운동 인사들을 체포해 고문하는 공작을 강화했다.
1981년 6월18일 내무부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에 ‘대공과’가 설치됐다. 정보과의 공안 기능을 확대·강화한 부서로, 반독재 투쟁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겠다는 의도였다. 유숙열이 물고문을 당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그들의 안방이었다. ‘국제해양연구소’라는 위장 간판을 단 그 건물에서 정권은 숱한 민주화 운동가들을 고문했다.
찍어 누를수록 저항도 거세졌다. 온 사회가 어떤 임계。을 향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1986년 5월3일, 인천 시민회관 앞에 수만명이 모여 시위를 시작했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주도한 ‘5·3 민주항쟁’이었다. 광주·대구·대전 등에서 벌어지던 민주화 시위가 서울 턱밑까지 올라오자 정권도 강하게 대응했다. 경찰은 강경 진압을 벌여 당일에만 319명을 연행하고, 대공부를 앞세워 주도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긴급조치’가 시퍼렇던 1976년이었다. ‘서울대 522 데모’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이부영을 교도관 전병용이 찾아왔다. 그 시절 감옥에는 민주화 운동가들의 뜻에 공감하는 교도관들이 더러 있었고, 전병용도 그중 한 명이었다.
“눈도 크고 코도 크고, 뚜렷하게 잘생긴” 첫인상이 기억에 남았지만, 이부영이 가장 놀란 건 그의 담력이었다. 독재에 반대하는 반골 교도관들은 수감된 운동가들과 바깥 조직을 연결하는 ‘비둘기’ 역할을 자임하곤 했다. 들키면 위험한 일인데 전병용은 너무 대담했다. 이부영은 그가 다른 일반수들이 다 보는 데서 구속된 신현봉 정의구현사제단 신부의 방에 대놓고 메시지를 전하던 광경을 아직도 기억한다.
“저 교도관 놈 비둘기 심부름한다!” “저놈 잡아라!” 일반수들이 아우성을 쳤다. 전병용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유유히 떠났다.
“야, 어쩌자고 다들 내려다보는데 그렇게 하냐? 그러지 좀 마.” 전병용의 행동에 오싹해진 이부영이 걱정을 담아 말했다. “이형, 그때만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쟤들 금방 잊어버려요.” 전병용이 답했다. 그는 삼엄한 경비를 뚫고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을 감옥 밖으로 몰래 반출시킨 적도 있었다. 정권의 인권유린을 폭로한 명문에 장폴 사르트르와 빌리 브란트 등 해외 명사들이 연대했다.
그런 전병용이었기에 이부영도 안심하고 연락할 수 있었다. 전병용이 살던 서울 연희동 작은 아파트는 그 전부터 오랫동안 여러 수배자에게 도피처가 돼 준 곳이었다. 하지만 경찰도 작정하고 수배망을 펼치고 있었다. 이부영이 잠시 집을 비웠을 때 수사관들이 아파트를 덮쳤다. 이부영을 만나러 전병용의 집에 와 있던 민통련 정책연구실장 장기표가 그대로 끌려갔고, 이부영도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가 붙잡혔다.
전병용은 10개월 동안 도피하다가 1987년 3월17일 체포됐다. 제복을 입고 감옥을 지키던 교도관이, 죄수복을 입고 감옥에 갇힌 수인이 됐다. 하지만 그는 의기소침해하지 않았다. 독재에 저항한 양심수들을 보며 수상한 시절에 ‘죄’란 무엇인지 고민해 온 그는, 범인은닉죄 재판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록 우리 집이 아니라도 이 세상 어딘가에 그가 머물 수 있는 땅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으며, 만약 또다시 그(이부영)가 나를 찾아온다면 언제든지 반갑게 맞이할 것입니다. 불의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우리 집의 대문은 항상 활짝 열려 있습니다.”
전병용이 최후진술을 하던 때, 바깥 세상은 그가 날리고 온 ‘비둘기’ 때문에 뒤집어져 있었다. 이번엔 좀 컸다. 이부영이 갇혀 있던 영등포교도소에 말단 경찰 두 명이 들어온 게 시작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정권은, 주범도 아닌 그들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워 사건을 축소하려 했다. 낌새를 눈치챈 이부영은 진실을 취재해 온 오랜 친구이자 민주화 운동가인 김정남에게 편지를 썼다. 해직기자 이부영의 특종이 담긴 편지 세 통은 교도관 한재동을 거쳐 전병용에게 전해졌고, 전병용은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 김정남에게 편지를 무사히 넘겼다.
1987년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편지 내용을 바탕으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6월항쟁의 불길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전두환 정권은 마침내 무너졌다. 그때쯤 집행유예를 받은 전병용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영화 <1987>의 교도관 ‘한병용’은 이때의 전병용과 한재동을 모델로 한 캐릭터다.
◆ ◆ ◆
군부독재가 무너진다고 아름다운 세상이 완성되는 건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는 또 다른 커다란 난제들을 품고 있었다. 싸움의 전선은 노동, 양극화, 주거, 환경, 차별, 성평등 등으로 넓어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힘든 사람들은 보금자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독재와 싸운 투사 중 적지 않은 이들은 또 다른 기득권이 돼 있었다. 세상은 어떤 면에서는 나아갔지만 다른 면에서는 차가워졌다. 그 추위 속에 많은 이들이 고립되고 끝내 무너졌다.
그런 이들에게 변함없이 ‘셸터’를 자임한 교회가 있었다. 1970~1980년대 반독재 시위의 주무대인 명동 한복판에 있던 향린교회였다. 명동성당과 함께 독재정권에 쫓기는 수많은 이들을 보호한 향린교회는 1987년 6월항쟁의 구심。인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결성대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민중신학’의 개척자인 안병무·홍창의 등이 세운 향린교회의 눈은 늘 낮은 곳을 보고 있었다. 2010년 여름, 정부가 서울 G20(주요20개국) 정상회의를 앞두고 미등록 이주노동자 무차별 단속에 나섰을 때는 한 달 넘게 1층 유치부실을 개방해 그들을 보호했다. 밀양 할머니들의 송전탑 반대 상경 투쟁,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 세월호 사건 진상규명 투쟁에도 숙식을 제공했다.
정부가 평택 미군기지를 짓겠다며 군경을 동원해 주민들을 강제 퇴거시킨 2006년 ‘대추리 사태’ 때, 교인들은 아예 현장에 천막을 치고 평화기도회를 열었다. 천막 교회는 저항의 거.이자 공권력이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우산이었다. 그 뒤로도 향린교회는 용산참사와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 등 사회적 비극의 현장에서 천막을 치고 사람들을 지켰다.
향린교회가 천막을 치면 경찰은 긴장했다. 교회 천막을 철거하는 일은 정치적·법적으로 민감한 이슈가 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나가라는 향린교회의 정신과, 피난할 곳이 필요한 이들에게 장소를 제공한다는 건 똑같은 의미거든요.” 김창희 장로가 말했다.
향린교회는 재개발로 오랜 터전이었던 명동을 떠나 2023년 광화문 인근으로 자리를 옮겼다. 새 건물 건축가에게 교인들이 전달한 요구는 독특했다. 거처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샤워 시설을 설치할 것, 성소수자도 마음 편히 쓸 수 있는 ‘성중립화장실’을 만들 것.
◆ ◆ ◆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얼굴이 붉어진 대통령 윤석열이 갑자기 TV에 나와 45년 만의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몇 시간 되지 않은 2024년 12월4일 새벽, 향린교회 장로 채운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시민단체 관계자의 전화였다. 비상시국회의를 열어야 하는데 교회 공간을 빌릴 수 있겠냐고 그는 물었다. 채운석은 장로들이 모인 단체 대화방에 안건을 올렸다. 다들 일어나 있었다. 동의는 3분 만에 이뤄졌다. 향린교회는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의 주요 거。이 됐다.
혼란하고 추운 겨울이었다. 탄핵 촉구 시위가 매일같이 이어졌다. 두 번의 시도 끝에 2025년 1월15일 윤석열이 체포됐지만, 탄핵 절차는 더디게 진행됐다. 그리고 3월7일, 법원의 구속취소 인용으로 윤석열이 풀려났다. 수많은 시민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겨울 추위가 아직 남아 있던 그날 늦은 밤, 시위를 마치고 집에 가던 채운석은 길에서 많은 이들이 망연하게 밤을 새우는 풍경을 봤다. ‘이거 안 되겠다. 건강 상할 텐데….’ 다음날 그는 교회 사람들에게 쉼터 운영을 제안했다. 싸우는 이들에게 항상 품을 내어주던 향린교회 대문이 다시 열렸다.
1층 어린이부실은 남성 방, 4층 유치부실은 여성 방, 5층 청소년부실은 ‘성중립방’으로 개방했다. 남녀 교인 1명씩 매일 당직을 섰다. 불과 한 달 전 한문덕 담임목사의 취임 기념식이 열렸기에 수건도 많았다. 매일 10~20여명이 교회를 찾아 씻고, 몸을 녹이고, 잠을 청했다. 헌법재판소가 윤석열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한 4월4일까지 쉼터는 문을 열어뒀다.
자신을 ‘26살의 평범한 IT 개발자’라고 소개하는 ‘레비(SNS 아이디)’도 쉼터 신세를 졌다. 탄핵 정국 때 취업 준비생이었던 레비는 대학 종강 이후 집회에 본격적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두 개의 교실을 오가는 날들이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개발자 부트캠프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부트캠프를 마친 뒤에는 광장으로 출석해 민주주의를 배웠다. 큰 광장에서 열리는 대형 집회도 참석했지만, 레비가 좋아한 건 홍대 거리에서 열리는 작은 집회였다. 발언 기회가 자유롭게 주어지는 ‘오픈 마이크’ 시간엔 성소수자와 노동자, 청년 당사자의 목소리를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었다.
윤석열이 풀려난 3월7일은 그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너무 아연해서 그날 어떻게 집회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계엄까지 저질러 잡혀 들어간 인간이 나온다니, 믿을 수 없는 사태에 대한 공포와 분노”만 생생하다. 다른 이들처럼, 그도 밤샘 집회에 참여하는 날이 늘었다.
향린교회 쉼터를 찾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머리는 떡져 있고 몸에서는 쉰내가 났다. 이대로 부트캠프에 갔다가는 쫓겨날 것 같았다. 그때, 언젠가 어렴풋이 들었던 향린교회 쉼터가 떠올랐다. 머무른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샤워를 하고, 추위에 굳은 몸을 녹이고, 다시 거리로 나갔다.
부트캠프 수업 도중 탄핵 소식을 들은 4월4일 이후 요즘까지도 레비는 여러 투쟁 현장에 나간다. 광장에서 알게 된 이들의 싸움은 탄핵과 대선을 거친 뒤에도 대부분 해결되지 않았다. “활동가는 아니고 그냥 개인”이지만 “지금 내가 가서 도울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돕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어느 날 집회에서 알게 된 한 사람이 말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나온 사람들이 환대의 기억을 갖고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내가 받은 환대의 기억이 있다면 무엇일까. 레비는 돌아봤다. 추운 날 힘들게 싸우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던 교회 문일까. 한 번씩 돌아다니며 누워 있는 사람들의 건강을 체크하던 이들의 뒷모습일까. 돈도 안 받고 나눠주던 수건일까. 타인을 도우려는 사람이 그래도 꽤 많다는 걸 알게 해준 그 장면들을, 환대의 기억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환대받은 이는 다시 나간다. 다른 이의 곁으로.
<시리즈 끝>
[셸터: 서로를 구하다]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 위험을 무릅쓰고 국가폭력으로부터 타인을 지켜 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시리즈 전체 기사는 링크(https://www.khan.co.kr/series/articles/as436)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기획·연재 | 셸터: 서로를 구하다
릴게임야마토
https://www.khan.co.kr/series/articles/as436
열의 옆자리에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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