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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의 차이나 워치] 반도체 공급망 위기 대응 미비
2025년 한국과 대만의 교역액은 902억8000만 달러로 대만과 일본의 교역액 848억5000만 달러를 넘어섰고, 한국은 대만의 3위 교역 상대가 됐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대만이 한국에 판 것은 약 266억 달러로 대만 전체 수출의 4% 남짓인 반면, 한국에서 사 온 것은 그 두 배를 넘는다. 대만의 대한국 무역적자는 370억 달러에 이르렀고, 한국은 대만의 2위 수입국이자 최대 무역적자 상대가 됐다.
이 적자를 만든 것은 메모리반도체다. 대만은 한국산 메모리를 AI 서버에 넣어 세계로 수출하고, 한국은 대만에서 웨이퍼와 기판을 사 온다. 서로의 소비자에게 완제품을 파는 교역이 아니라, 두 나라의 부품이 같은 제품 안에서 만나는 분업이다. 이 숫자가 보여주는 것은 시장의 연결이라기보다 공급망의 연결이고, 적자의 크기는 한쪽의 손실이 아니라 깊이를 보여준다.
한국과 대만이 어디까지 얽혀 있는지는 교역액보다 제조 공정을 보아야 알 수 있다. AI 서버에 들어가는 고성능 메모리 HBM은 D램을 여러 층으로 쌓아 만든다. 그 맨 아래에는 D램과 연산 칩 사이의 데이터 흐름을 통제해 속도와 전력 효율을 좌우하는 ‘베이스 다이’가 깔린다. SK하이닉스는 이 부품을 자체 공정으로 만들어 왔으나, 2024년 4월 TSMC와 양해각서를 맺은 뒤 6세대 제품인 HBM4부터는 TSMC 공정으로 만들고 있다. 완성된 메모리는 대개 TSMC의 패키징 공정에서 연산 칩과 하나로 합쳐진다. 메모리를 거래하던 관계가 메모리를 함께 만드는 관계로 바뀐 것이다.
이달 18일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보도가 나왔다. 엔비디아가 2027년부터 쓸 맞춤형 HBM을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세 회사에서 공급받되, 베이스 다이는 모두 TSMC의 3나노 공정으로 만들라고 요구했고, 삼성전자도 이를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삼전닉스는 대만서 웨이퍼·기판 수입
눈여겨볼 것은 이 분업의 방식을 누가 정했는가다. 한국도 대만도 아닌 미국 기업이었다. 고객은 자기 제품의 규격을 정하고, 물량을 확보해야 하는 공급사는 그 규격에 맞춘다. 메모리부터 패키징까지 자체 공정을 고수해 온 삼성이 TSMC 공정을 받아들인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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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가 한국산 메모리와 한 제품 안에서 결합하게 된 것 역시 그 공정이 지금 고객의 기준에 가장 잘 맞기 때문이지, 한국과 대만이 서로를 협력 상대로 고른 결과가 아니다.
그렇다고 관계가 느슨하다는 뜻은 아니다. 제품과 공정을 함께 맞춘 관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6월 2027년 HBM 시장 전망을 1160억 달러로 54% 높여 잡으면서 메모리 공급 부족이 2028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봤다. 맞춤형 HBM으로 갈수록 메모리 회사와 파운드리는 설계 단계부터 함께 움직여야 한다. 다만 결합이 깊어져도 그 조건을 정하는 쪽은 여전히 미국 기업이다. 미국 기업이 규격을 바꾸거나 주문을 옮기면 한국과 대만의 공급사가 함께 흔들린다.
경쟁도 여전하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와 TSMC는 첨단 위탁생산 시장에서 같은 고객을 놓고 다투고, SK하이닉스는 TSMC와 HBM 부품과 패키징에서 협력한다. 한국과 대만을 통째로 경쟁자나 협력자로 나누기 어렵다.
거래가 늘어난다고 위기 대응을 위한 정보 공유와 조정까지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2024년 4월 대만의 동쪽 화롄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TSMC는 일부 공장의 직원을 대피시키고 생산을 멈췄다. 10시간 안에 장비의 70% 이상을 복구했지만 일부 라인은 추가 .검이 필요했다. 그 뒤 공정 협력이 깊어지면서 한국이 확인해야 할 공급망의 범위도 넓어졌다. SK하이닉스의 HBM4는 TSMC의 베이스 다이와 패키징을 거쳐야 완제품이 된다. 대만의 생산이 멈추면 한국 기업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는 재고와 대체 조달에 달려 있다.
재고를 쌓고 대체 공급사를 찾고 납기를 조정하는 것은 기업의 몫이다. 그러나 항만과 공항 운영, 통관과 출입국 절차, 전력 복구 일정은 기업이 정할 수 없고, 군사훈련으로 운송에 제약이 생겨도 당국의 공식 확인이 있어야 한다. 위기 때 기업이 가장 먼저 필요로 하는 것이 이런 정보다. 정부가 할 일은 기업이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이 정보를 상대 당국에 확인하고 협의하는 것이다. 위기가 닥친 뒤에 연락해서는 늦다. 평소에 담당자들이 접촉하며 무엇을 확인하고 공유할 수 있는지 합의해 두어야 한다.
한국과 대만 사이에 그런 절차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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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재외공관의 공급망 조기경보체계가 있고, 양측 경제계는 오랫동안 연석회의를 열어 왔다. 그러나 위기 징후를 보고받거나 경제 현안을 논의하는 것과, 차질이 생겼을 때 양측이 영향을 확인하고 대응을 협의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일본과 대만은 양측 교류협회가 주관하는 무역경제회의를 49차례 이어 왔고, 2024년 12월 회의에서는 디지털 무역 약정과 세관 협력 각서에 서명했다. 한국과 대만 사이에서 그에 해당하는 절차는 공개된 자료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거래는 공정 안까지 들어갔는데 소통 채널은 그만큼 깊어지지 않은 것이다.
왜 이런 공백이 생겼는가. 그 답을 찾으려면 한국이 대만과 관계를 맺을 때 놓이는 구조적 제약을 먼저 보아야 한다. 그 제약은 산업·안보·정치의 세 차원에서 일본과 다르다.
첫째, 산업 구조가 다르다. 일본과 대만은 일본이 소재와 장비를 대고 대만이 웨이퍼를 만드는 보완 관계다. 일본 정부가 TSMC 구마모토 공장에 거액을 보조해 온 것은 자국에 없는 첨단 로직 양산 능력을 들여오기 위해서였다. 한국은 같은 선택을 할 수 없다. 메모리와 로직에서는 서로를 보완하지만, 첨단 파운드리에서는 같은 고객을 놓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둘째, 안보 구조가 다르다. 일본에 대만해협은 대만에서 약 110㎞ 떨어진 요나구니섬 등 남서제도 방어의 최전선이다. 한국의 첫째 안보 과제는 북한이고, 대만해협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해상교통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연결될 뿐이다. 여기에 북한 문제에서 중국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더해지면서, 한국은 대만 문제에서 오랫동안 모호한 태도를 유지해 왔다.
셋째, 정치와 정체성이 다르다. 일본과 대만은 1972년 단교 뒤에도 반세기 넘게 엘리트 인맥과 지방 교류, 대중의 호감을 쌓아 왔다. 한국은 1992년에 단교했고, 대만에는 그 통보 방식에 대한 부정적 기억이 남아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대만은 오랫동안 ‘잊혀진 이웃’이었다. 두 관계는 출발。이 다르고 쌓인 신뢰의 두께도 다르다.
이 세 가지가 한국과 대만을 갈라놓는 조건이라면, 바깥에서 둘을 함께 움직이는 변수도 있다. 미국이다. 그 작용은 한 방향이 아니다. 미국 기업이 정하는 규격은 한국과 대만 기업을 같은 공급망 안에 더 단단히 묶는다. 반면 미국 정부가 주도하는 공급망 재편은 대미 투자와 관세 조건을 놓고 양측을 경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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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같은 압력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은 공동 대응의 유인도 만든다. 경쟁과 협력의 유인이 같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국, 중국 의식해 대만과 실무협력도 미적
협력을 깊게 하는 데는 비용도 따른다. 다카이치 일본 총리는 2025년 11월 대만 유사시를 ‘존립위기사태’와 연결하는 발언을 했다. 그 뒤 1년간, 중국은 수산물 수입을 다시 중단하고 군민양용 품목의 대일 수출을 통제했다. 올해 1~9월 중국의 대일 희토류 영구자석 수출은 4% 줄었지만, 반도체 장비에 쓰이는 산화이트륨은 98% 줄었다. 여기서 읽어야 할 것은 협력을 포기하라는 경고가 아니다. 협력의 방식에 따라 위험의 크기도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일본의 길을 갈 조건도, 이유도 없다. 다만 문제는 ‘하나의 중국 존중’이라는 틀 안에서 우리가 정당하게 할 수 있는 실질 영역까지 스스로 좁혀 왔다는 데 있다. 한·중수교 때 한국이 약속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하고 ‘하나의 중국’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것이었지, 비공식 경제관계를 제한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외교의 상징 영역에서 신중한 것은 필요한 태도이지만, 자국 산업이 입을 영향을 확인하는 실무적 제도를 만들지 않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10월 23일 한일 재계회의 일본 대표단에게 “첨단산업 공급망 차원에서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했고, 외교부 2차관은 같은 날 공급망에서 한국의 ‘전략적 대체불가성’ 확보를 실용외교의 과제로 내걸었다. 이 원칙이 한국 반도체가 가장 깊이 얽힌 상대 앞에서만 멈춰 설 이유는 없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틀이 아니라 기능이다. AI 반도체 회복력 대화, 공급망 스트레스 테스트, 재해나 군사훈련으로 생산에 영향이 생길 때 서로 확인하는 실무 연락 절차의 제도화가 그것이다. 양측은 이미 대표부 간 약정으로 이중과세방지 제도를 만든 경험이 있다. 한국이 먼저 정할 것은 대만과 얼마나 가까워질지가 아니라, 이미 연결된 자국 산업을 어떤 제도로 보호할지다. 거래로 이어진 관계를 위기의 순간에도 서로 확인하고 조정할 수 있는 관계로 바꾸는 것이 목표다.
장영희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대만연구센터 센터장.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로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겸임교수를 겸하고 있다. 국립대만대 국가발전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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