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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지마” 휠체어 女검객들
의심하지 않고 서로를 믿으면 불가능해 보였던 일도 현실이 된다.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뒤 TV 속 ‘휠체어 검객’에게 매료돼 칼을 쥔 조은혜와 ‘검객’ 김선미는 함께 장애인아시안게임 금메달에 도전한다.⟫
“아름답다.”
2017년 10월 서울 한 재활병원 6인실. 그해 낙상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조은혜(41)는 병실 벽에 걸린 24인치 TV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TV 화면에는 스포츠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조은혜는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데 자신이 있었다.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영화 촬영장에서 배우들을 빛내주던 분장팀장이었기 때문이다. 마동석, 윤계상 등이 열연을 펼쳐 688만 관객을 동원한 ‘범죄도시’가 그의 손을 거쳤다.
스포츠 뉴스에서 조은혜의 시선을 붙잡은 건 한 ‘검객’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도복을 차려입고 앞치마(에이프런)를 두른 여성이 휠체어에 앉아 상대를 겨눴다. 칼끝이 빠르게 움직였다.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에 상대 몸통을 찌른 뒤 포효했다. 조은혜는 자신도 모르게 이 휠체어 펜싱 선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 아름다움을 좇는 모험
‘아름다운 걸 보면 가슴이 뛰어서.’ 조은혜가 분장 일을 시작한 이유다. 하반신 마비 진단을 받았을 때는 그 아름다움과 영영 멀어질 줄 알았다. 삶을 놓으려 한 적도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마음속에 해가 떴다가 천둥 번개가 치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TV 화면 속 검객 덕에 조은혜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조은혜는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대한장애인펜싱협회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화를 걸었다. 다짜고짜 “펜싱을 배우겠다”고 매달렸다. 며칠 뒤 서울장애인펜싱협회 소속 감독이 병실 문을 두드렸다.
그 감독은 “펜싱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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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운동을 배우라”고 만류했다. 오기가 생겼다. “죽어도 펜싱이 하고 싶다”고 버텼다. 감독이 물었다. “하고많은 운동 중에 왜 펜싱이냐.” 조은혜가 답했다. “기왕이면 아름다운 거 하고 싶어서요.”
조은혜는 2019년 4월 재활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손에 검을 쥐었다. 병실까지 찾아와 만류했던 그 지도자가 현재 휠체어 펜싱 대표팀을 이끄는 유승열 감독(49)이다.
조은혜에겐 또 한 명의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TV 화면에서 보았던 검객 김선미(37)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태극마크를 달고 18일 일본에서 막을 올리는 2026 아이치-나고야 장애인아시안게임에 출전한다. 조은혜가 김선미와 함께 장애인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조은혜, 김선미는 권효경(25), 조예진(22)과 함께 이번 대회 사브르, 에페, 플뢰레 등 펜싱 전 종목 단체전에 출전한다. 한국 휠체어 펜싱 대표팀은 3년 전 항저우 대회 때까지 장애인아시안게임에서 은 3개, 동메달 19개를 따냈지만 금메달은 아직 없다. 대한장애인체육회 이천선수촌에서 최근 만난 네 선수는 이구동성으로 “단체전 금메달이 목표”라고 했다.
선수들은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서 어떤 세리머니를 할지도 정해뒀다. 걸그룹 ‘리센느’가 유행시킨 ‘야호’ 포즈다. 2024 파리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 여자 에페 개인전에서 은메달을 땄던 권효경은 “언니들이 이미 다 작당을 해두셨다. 나는 분부대로 따르겠다”며 웃었다.
네 선수는 지난달 태국 파타야에서 열린 장애인 펜싱 월드컵 에페 단체전 결승에서 ‘세계 최강’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네 선수가 호흡을 맞춘 지 1년 만이었다. 장애인 펜싱에서 월드컵은 세계선수권 다음으로 권위가 높은 대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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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휠체어 펜싱이 메이저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대표팀 ‘맏언니’이자 주장인 조은혜는 “개인전에서 나 혼자 잘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우리가 해냈다’는 쾌감은 개인전 승리의 100배에 달하는 행복감을 줬다”며 웃었다.
이어 “8년 전 그날 병실에서 스포츠 뉴스를 보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만날 수 있었을까 싶다”며 “나보다 앞서 이 길을 열어준 (김)선미에게 감사하다. 선미 덕분에 지금까지 가슴 뛰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곁에서 귀를 기울이던 김선미가 “그렇게 말해줘서 내가 고맙다”면서 “장애를 드러내길 참 잘한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 “내 다리를 숨기지 않아도 되니까”
조은혜가 한눈에 반했다는 김선미는 사실 그 당시 자신이 아름다운지 몰랐다. 어린 시절부터 키(현재 170cm)가 컸던 김선미는 원래 항공 승무원을 꿈꿨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 때 당한 교통사고로 모든 게 바뀌었다. 친구 오토바이 뒷자리에 탔다가 마주 오던 트럭과 충돌했던 것. 김선미는 이 사고로 왼쪽 다리를 무릎 위까지 잘라내야 했다.
그때 펜싱이 김선미를 찾아왔다. 김선미는 “절단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 휠체어를 타신 분이 병문안을 오셔서 가족에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그분 남편이 휠체어 펜싱 간판이던 김기홍 선수(55)였다”면서 “그분께서 ‘나이가 어리니 운동으로 재활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셔서 처음으로 펜싱 칼을 쥐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솔직히 처음 1년 동안에는 그냥 운동하는 척만 했다.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운동을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사춘기라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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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가 운동에 마음을 붙이게 된 건 두 살 터울 남동생 때문이었다. 김선미는 “첫 대회에 출전하고 돌아왔는데 동생이 ‘누나, 정∼말 못하더라’라고 놀리더라. 그래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던 게 여기까지 오게 됐다”며 웃었다.
문제는 칼이 ‘밥’을 먹여 주지는 않았다는 .이다. 2010년 광저우 장애인아시안게임 에페 개인전 은메달을 목에 건 김선미는 2014년 인천 대회 때 같은 종목 동메달을 딴 뒤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구직 활동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김선미는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까 웹디자인이 눈에 띄었다. 포토샵을 배워서 생계를 이어 갔다”고 했다. 김선미는 매일 아침 의족을 스펀지로 겹겹이 감싸고 긴 바지로 다시 가린 뒤 출근길에 나섰다.
그러다 대원지오텍에서 2017년 1월 국내 1호 장애인 펜싱 민간 실업팀 ‘온에이블’을 창단하면서 김선미는 다시 칼로 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당시 이 팀 선수는 김선미 한 명뿐이었다. 김선미는 “다시 피스트 위에 서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여기서는 내 다리를 숨기지 않아도 됐다. 그제야 제대로 숨이 쉬어졌다”고 했다. 김선미는 그해 전국장애인체육대회 4관왕에 오르면서 TV 뉴스에도 나왔다. 조은혜가 봤던 그 뉴스다.
다만 피스트를 벗어나면 여전히 남들 시선이 두려웠다. 피스트 위에서 느끼던 자유로움을 일상으로 가져오는 일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김선미가 용기를 낸 건 2018 자카르타 장애인아시안게임을 앞두고서다. 훈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들렀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의족을 그대로 드러냈다.
막상 사람들 앞에 서자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다. 김선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다. 다음 발걸음은 거짓말처럼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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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는 “나만 괜찮으면 남들 시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 좌우명이 생겼다. “장애를 드러내라. 숨기지 마라.” 김선미는 2019년 한 금융회사 광고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출연했다. 현재 김선미의 인스타그램 대문에는 의족 사진이 걸려 있다. 한때 최선을 다해 숨기려 했던 그 의족이다. 이제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인연을 만났다. 김선미는 “나를 보며 휠체어 펜싱에 뛰어들었다는 고백이 이제는 내 삶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 “의심하지 마, 너를 믿어”
두 사람이 휠체어에 앉아 검을 쥐게 된 사연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나 피스트 위에 오르는 이유는 같다. “피스트 위에선 휠체어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휠체어 펜싱은 아름답기만 한 종목이 아니다. 하얀 도복 아래에 크고 작은 상처가 쌓인다. 상대 칼끝이 몸을 찌르면서 피멍 자국이 가실 날이 없다. 휠체어 펜싱 선수는 발을 움직여 상대와 거리를 조절할 수도 없다. 그 대신 칼을 쥐지 않은 손으로 휠체어를 붙잡아 몸의 균형을 잡는다. 그 손도 상대 칼에 찔린다.
선수 생활을 이어 가는 일도 여전히 쉽지 않다. 국내 휠체어 펜싱 실업팀은 두 개뿐이다. 생계를 꾸리면서 훈련까지 이어 가는 일은 ‘각자 알아서’다. 조은혜도 낮에는 펜싱 칼을 쥐고 밤에는 집에서 재봉틀을 돌렸다. 조은혜는 “처음엔 펜싱보다 재봉틀을 돌리는 시간이 더 많았는데 펜싱이 .차 내 삶의 100%를 차지하게 됐다”고 했다.
처음에는 펜싱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검을 쥐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마음도 달라졌다.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지난 대회 패배가 떠올라 잠을 설쳤다. 지는 게 분했고 이기고 싶었다.
조은혜가 승부사 기질에 눈뜬 건 2019년 말이었다. 그해 마지막 국내 대회에서 국가대표 출신 이유미(46)를 15-14, 1。 차로 꺾은 게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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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은혜는 “펜싱을 배우고 나서 (이)유미 언니를 한 번쯤 넘어서고 싶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그 생각이 현실이 된 것”이라면서 “다치기 전엔 내 안에 승부사가 숨어 있는 줄 몰랐다. 펜싱이 아니었다면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조은혜가 이번 장애인아시안게임 금메달 꿈도 현실로 만들려면 중국을 다시 무너뜨려야 한다. 중국은 지역별 대표만 10명이 넘을 정도로 여자 휠체어 펜싱 선수층이 두껍다. 반면 한국 선수는 전국을 통틀어 10명뿐이다. 그중 6명이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는다. 그래도 ‘만리장성’을 무너뜨렸던 경험이 자신감을 준다.
지난 1년 동안 조은혜가 대표팀 동료들과 함께 갈고닦은 건 펜싱 기술만이 아니었다. 서로를 믿는 마음이었다. 조은혜는 동료가 피스트 위에 있을 때면 늘 목청 높여 외친다. “의심하지 마.”
조은혜는 “‘네가 지금 머릿속에 그린 그 기술이 정답이야. 너 자신을 믿어’라는 뜻”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돌이켜 보면 흔들리던 나 자신을 향해 던진 최면이기도 했다. 주문처럼 이 말을 되뇌다 보니 우리가 가진 힘을 의심하지 않게 됐다”고 덧붙였다.
조은혜는 8년 전 TV에서 처음 본 김선미와 나란히 태극마크를 달게 될 줄 몰랐다. 김선미 역시 의족을 드러내기로 했던 그 선택이 누군가를 피스트로 이끌 줄 몰랐다. 한 사람의 용기가 다른 사람의 동경이 됐다. “의심하지 마”라는 다섯 글자에는 오랜 기다림과 서로 다른 시간들이 켜켜이 포개져 있다.
두 사람이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올지 아직 알 수 없다. 다시 중국과 만나 한 。 한 . 다투며 피 말리는 승부를 이겨내야 한다. 두 사람이 꿈꾸는 시상대 제일 높은 곳은 아직 저 멀리에 있다. 그러나 조은혜와 김선미가 함께 꿈을 꾼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곳에 오르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 “의심하지 않았어.” 이 한마디면 충분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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