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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이 이뤄지고, 그야말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베이비 붐이 일었고, 이농 현상도 두드러졌다. 너도나도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중 으뜸이 서울이었다. 1954년 124만 명이 1967년 400만, 1970년 500만, 1972년 600만 명으로 불어났다.
독재 정권에게 경제는 외길이었다. 저임금정책으로 나아갔다. 이에 값싼 면직물을 대량 공급하고 저곡가정책을 시행한다. <한미 잉여농산물협정(1955.5)>에 따라 미국 식량원조가 기한을 넘겨 197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다. 저임금과 저곡가는 불가분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농촌이 피폐해지고, 도시엔 산업예비군이 넘쳐났다.
▲ 백마부대 환송식(1968).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는 백마 부대 환송 행렬이 종로를 지나고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1963년 광부 1진이 서독으로 간다. 덕분인지 1964년 12월, 1억 5900만 마르크의 차관을 공여받는다. 1964년 비전투 부대를 시작으로 월남전 파병이 본격화한다. 1965년 <한일 협정>이 체결된다. 3억 달러 무상자금과 2억 달러 장기저리 차관, 3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이 공여된다.
비료공장, 나일론공장, 화력발전소에 서독의 지원이 이어진다. 보답으로 1966년 간호사를 서독으로 보낸다. 전쟁터 목숨값과 젊은이들이 땀 흘려 벌어들인 돈이 피처럼 돌기 시작하자,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순차적으로 시행된다. 도로와 철도, 항만과 댐, 공항과 발전소, 택지와 산업단지로 온 국토가 공사판이다. 1964년 9월 22일 <대도시 인구 집중 방지책>이 발표되나, 구호에 불과했다. 집약된 도시여야만 경제는 효율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넓혀지는 서울
1963년 서울이 넓어진다.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려 행정구역을 확장했다. 1966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막을 내린다. 피땀 흘려 벌어들인 외화에 더하여 외국의 차관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 여파로 인구증가는 더 가팔라진다. 4대 문밖 산등성이가 온통 빈민촌이다. 생계 문제도 시급했지만, 무엇보다 주거 안정과 일자리, 슬럼 해소가 최우선이었다. 인구가 폭발했어도 살 집은 턱없이 부족했다. 노동환경은 어쩌면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자유당 때부터 넓어지기 시작한 빈민촌이 1960년대 들어 더욱 확산한다. 1960년대 후반까지 시행된 '정착촌'이 주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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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4대 문에서 좀 더 먼 곳으로 쫓아내려는 목적이다. 도시 빈민의 공간이동에 불과한, 한마디로 '무대책 철거 이주 정책'이었다.
▲ 무대책의 이주 정책인 '정착촌'에 따라 형성된 1967년의 봉천동.
ⓒ 서울역사박물관
이로써 빈민촌이 외곽으로 더 넓게 확장해 나갔다. 산등성이는 물론 빈 땅마다 판잣집이 꽉 들어찬다. 청계천을 비롯한 미아리와 상계동, 봉천동과 신림동이 대표적이다. 집도 형편없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두꺼운 종이·루핑·목재·아연철판 등이 재료다.
▲ 금화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의 1968년 천연동의 모습.
ⓒ 서울역사박물관
당시 판자촌은 상상보다 열악했다. 비바람은 물론 분뇨가 발에 차인다. 식수는 말할 필요도 없다. 생활 쓰레기는 그냥 재활용품이다. 빨래와 목욕은 언감생심이다. 위생은 물론 난방과 기초적인 식생활도 해결 난망이다.
1961년 약 8만 8천여 동, 1964년 11만 6천여 동으로 추산된다. 동당 세대수와 세대별 가구원 수도 파악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로나 상하수도 등은 그림의 떡이다. 하물며 위생을 따질 형편이던가? 나라는 이들이 사는 집에 '무허가 불량 주택'이라는 영광스러운 딱지를 붙여 주었다.
불도저 시장
1966년 3월, 서울시장으로 김현옥이 임명된다. 부임하자마자 도로에 손대기 시작한다. 첫날 광화문 네거리에서 도시계획국장과 건설국장을 호출한다. 이는 그의 앞으로 행보를 예견하는 유명한 일화다. 거기서 광화문 교통 대책을 가져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부임 첫해는 교통난 해소가 목적이다. 도로의 신설·확장은 물론 지하도, 육교, 고가도로를 가리지 않는다. '교통 도로'라는 모호한 명칭을 사용한다. 또한 무척 즉흥적이다. 현장을 다니다 눈에 거슬리면 꼭 뭔가를 건드려야 직성이 풀렸다.
▲ 독립문(1996). 금화아파트가 헐리고 새로운 아파트를 짓고자 터를 파헤친 모습. 무악재 주변도 재개발 전이라 시야가 넓다.
ⓒ 서울역사데이터서비스
▲ 독립문 옆 아파트(2026). 고가도로 옆 금화터널 방향으로 재건축된 아파트의 현재 모습.
ⓒ 이영천
설계 도면도 없다. 공사 기간도 특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예산도 수립되지 못했다. 곳곳이 무작위로 파헤쳐 진다. 서울시가 온통 공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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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설자재가 품귀를 빗는다. 그래도 그에게 중지나 후퇴는 결코 없다. 중앙정부가 나서, 필요한 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해 공급할 지경이다. 야간 돌관공사가 일상이다.
그의 행보는 。입가경이다. 그가 몰입하는 대상도 해마다 바뀐다. 1966년은 지하도·육교·고가도로였고, 1967년은 세운상가·낙원상가·대왕 코너 등 상가였다. 1968년은 한강과 여의도 윤중제였고, 1969년이 시민 아파트다.
최고 권력자도 틈만 나면 "무허가 건물의 발생을 억제하라. 무허가 건물 정리를 서둘러라"며 슬럼화한 주택의 정리를 강압한다. 무대책이어도 철거부터 하라는 지시였을까.
금화아파트
가만히 있을 시장이 아니다. 그가 1966년 각 구청을 통해 '무허가 불량 주택 전수조사'를 실시한다. 불량 주택 13만6650동에 서울 인구 37%가 거주한다는 결과였다.
▲ 약도 방식으로 그려진, 1968년 12월에 발표된 '69 시민아파트 건립 기본계획'의 축약 본.
ⓒ 서울역사박물관
1968년 12월 3일, 이른바 <69 시민 아파트 건립 기본계획>을 발표한다. 동당 45가구 2천 동을 1971년까지 짓고, 부족한 5만여 가구는 광주(성남) 대단지 등으로 이주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서울시장이, 1968년 6월 착공해 1969년 4월 21일 준공되는 19개 동 855세대 '금화아파트'에서 자신감을 얻은 결과로 유츄된다. 천연동과 현저동을 채워 123개 동 3524가구가 1971년까지 들어선다. 세밀한 지반조사도, 변변한 설계도마저 없는 주먹구구였다. 이때 이미 참사를 예비하고 있었다.
▲ 천연동 비탈에 공사 중인 1지구 금화아파트(1968.10.29). 사진 중앙에 인왕산이 보인다.
ⓒ 서울시청
발표된 계획에 따라 곳곳이 파헤쳐 진다. 1969년에만 서울시 32개 지구에 406개 동(1만5840가구)이 착공된다. 측량과 지질 등 기초적인 조사도 없다. 모든 게 괜찮을 거라는 가정 하에, 삽부터 뜨고 보았다. 설계도도 없이 금화아파트 도면이 재탕된다. 공사 기간도 6개월 남짓이다.
그마저 날림이다. 골조만 세운 빈 콘크리트 상자에 불과했다. 실내장식은 물론 공용공간마저도 언감생심이다. 내부의 전기·상하수도·부엌은 물론 계단과 옥상의 난간 같은 공용 시설까지 입주자가 설치해야 했다. 난방은 연탄보일러, 화장실은 복도 중간에 공동화장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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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공 1달 전 금화아파트 1지구의 모습. 준공식은 1969년 04월 21일에 열린다. 대통령 등 수천 명이 참석한 대대적인 행사였다.
ⓒ 서울시청
당장 먹을 쌀도 없으니, 공용 시설 설치에 인색할 수밖에 없다. 계단과 옥상의 난간을 설치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이들이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곳곳에서 불량 공사에 따른 문제.이 드러났다.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 한 동이 무너진다. 이로써 모든 시민 아파트에 위기가 닥친다. 금화아파트도 예외가 아니다. 4월 20일부터 철거가 시작된다. 한쪽에서는 새로 짓고, 다른 쪽에서는 갓 지은 아파트를 부수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1979년까지 68개 동 1684세대가 철거되었으니, 10년 만에 절반이 사라진 셈이다.
빈민은 살 수 없는
금화아파트는 천연동 불량주거지 철거 과정에서 탄생했다. 빈민을 정착촌으로 이주시키는 대신, 4~6층짜리 아파트를 건립하여 그 자리에 살 터전을 마련키로 한 것이다. 이른바 재정착을 통한 순환재개발을 유도하려는 시도다. 이처럼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발상과 속내는 무척 각박했다.
▲ 금화아파트가 들어섰던 천연동과 현저동의 모습. 오른쪽으로 재개발된 무악동과 인왕산의 모습이 보인다.
ⓒ 이영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서울시 간부가 "시장님, 왜 이렇게 높은 자리에 아파트를 지어야 합니까? 공사하기도 힘들고 입주자들이 출퇴근하기도 힘들 것 아닙니까? 조금 낮은 지대에 지으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 그에 시장은 "이 바보들아! 높은 데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라고 답했다고 한다. 시민은 안중에도 없었다.
▲ 금화아파트가 헐리고 재건축이 이뤄진 독립문 옆 금화터널 방향의 현재 모습.
ⓒ 이영천
그래도 인기가 있었다. '딱지'가 통용된다. 법으로 금지한 전매율이 70%를 넘어설 지경이었다. 만연한 투기다. 이마저 빈민에겐 허상이다. 철거 빈민의 입주율은 무척 낮았다. 내부공사비는 물론 분양가 원리금의 상환 능력이 부족해서다.
지금은 어떤가? 철거민 입주율이 100%일까? 아닐 것이다. 콘크리트 공화국의 민낯이다. 나라님도 어쩌지 못한다는 강고한 악순환의 고리가 도시빈민이다. 아파트 거주율이 전국적으로 52%다. 빈곤 해결책으로 천연동에서 제시된 주거행태가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다양한 공공 임대주택의 확대가 시급해 보인다. 모두가 행복하게 공존할 그나마 방법이기 때문이다.
거지 철거 과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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