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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10-17 18:20 조회 3 댓글 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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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말하는 '고난의 행군'은 원래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1938년 말부터 1939년 초까지 항일유격대가 혹한과 굶주림 속에서 행군했던 역사를 가르치면서 사용한 말이다. 이 표현을 1990년대 북한의 극심한 경제난에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는데,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다만 이미 그 경제난을 '고난의 행군'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화됐다는 .은 아쉽다.
당시 북한 주민들 가운데 그토록 엄혹한 시기가 닥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평생 인민을 위해 애쓰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 김일성 원수님'을 믿으며 살아왔고, 북한 밖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길도 없었다.
무너지는 경제, 멈춰가는 배급
▲ 고난의 행군 시。과 이후의 풍경 국가를 위한 충성심에서 가족을 살리기 위한 생존의 현장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그림.
ⓒ 박예영
북한의 경제위기는 하루아침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의 비효율과 낙후된 산업설비, 기술과 에너지 부족 등 구조적 문제가 오랫동안 누적돼 있었다. 여기에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1991년 소련의 해체로 교역과 지원이 줄면서 생산체계가 크게 흔들렸다. 1990년대 중반에는 자연재해까지 겹쳤다.
그러나 일반 주민들에게 위기는 배급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현실로 다가왔다. 내가 살던 지역에서는 한 달에 두 번씩 받던 식량 배급이 한두 차례 밀리더니 .차 누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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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반에서는 곧 식량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기다렸다.
당시에는 시장에서 언제든 쌀을 살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배급이 끊기면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집들이 많았다. 도시 주민들은 농촌에 친척이 있으면 찾아가 쌀을 꾸어오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 버티기는 어려웠다.
충성심으로 시작한 사회생활, 생존 앞에 서다
내가 학교를 졸업한 것은 1993년, 열일곱 살 때였다. 이듬해 김일성이 사망했고 경제난도 급물살을 탔다. 북한에서 성인으로 시작한 나의 사회생활은 정확히 그 경제난과 맞닿아 있었다.
저서 <진짜 아버지>에도 밝혔지만, 졸업 당시 나의 충성심은 하늘을 찔렀다. 당과 수령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큰소리치며 한 기업소의 목장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고, 목장에서 함께 일하던 청년들은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런데도 나의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먹고사는 일이었다. 기업소의 배급이 끊기면서 먹거리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가족 역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있었고, 결국 권고퇴사를 하게 됐다. 1996년 9월, 백수가 되어 산골에서 도시로 내려온 나에게 아버지는 야속하게도 "네 입은 네가 책임져라"고 말씀하셨다.
서운했지만 어린 동생 두 명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애쓰시는 부모님의 손을 덜어드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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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스스로 떠밀려 장사의 길에 올랐다.
국경지역인 량강도 혜산시에서는 금속이 비싸게 거래되었다. 공장의 기계 부속까지 뜯어내 팔아야 하는 반국가적인 행위는 내게 여전히 갈등과 불편함으로 남아 있었다. 당시 나는 미국과 전쟁을 치러야 하기에 군비에 막대한 자원을 쏟는다는 소문을 믿었고, 언젠가 경제도 좋아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당장 먹고살아야 한다는 현실은 매일매일 나를 옥죄었다. 그렇게 혜산을 오가며 강 건너 중국에 대한 소문을 접했고, 결국 1997년 2월 스물한 살에 처음 탈북했다.
그 과정에서도 당과 수령을 향한 충성심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컸다. 그러나 죽느냐 사느냐의 현실에서 충성심은 생존욕구를 이길 수 없었다.
생존의 현장에서 커진 장마당
이러한 변화는 나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배급을 기다리던 주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집 안에서 팔 만한 물건을 찾고, 만들 수 있는 것은 만들어 팔았다.
북한에는 1990년대 이전부터 제한적인 농민시장과 비공식 거래가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배급체계가 사실상 마비되면서 장마당은 생존의 공간으로 급속히 확대됐다. 이후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와 2003년 종합시장 도입을 거치며 시장활동의 일부가 제도화됐다. 2009년 화폐개혁 등 시장 통제에도 주민들의 시장 의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시장화는 기존의 계층 질서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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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출신성분이 사회적 기회를 좌우하는 중요한 기준이었지만, 이제 장사 능력과 자금, 유통망과 인적 관계도 삶을 결정하는 변수가 됐다. 김병로 박사는 2013년 발표한 '북한의 시장화와 계층구조의 변화'에서 기존 성분 질서 위에 새로운 경제적 계층분화가 겹치는 현상을 분석했다.
국가의 '우리'에서 가족의 '우리'로
지난 화에서 이야기했듯 북한 주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국가와 집단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배웠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기준이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은 그 '함께'의 중심을 흔들어 놓았다.
국가가 더 이상 먹여주지 못하자 가족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누군가는 장사를 하고, 누군가는 식량을 찾아 먼 길을 떠났다. 국가와 집단을 위한 충성보다 당장 내 가족을 살리는 일이 절박해진 것이다.
그렇다고 주민들이 하루아침에 국가와 수령에 대한 충성심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나와 같은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라 짐작한다. 여전히 충성하고 싶었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충성심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생존이 앞섰다. 국가와 집단을 중심으로 배웠던 '함께'가 가족의 생존을 지키는 '함께'로 무게중심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변화는 이후 북한 주민들의 삶과 가치관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렇게 가족을 지키기 위한 '함께'는 。차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간절한 갈망으로 이어졌고, 그 갈망은 어떤 이들에게 국경을 넘는 선택으로까지 이어졌다.
의 기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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