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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10-04 22:50 조회 118 댓글 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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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한편에는 언제나 검은색 피아노가 있었다. 아버지는 누나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피아노를 사주셨고 피아노 학원도 보내주셨다. 물론 누나와 난 피아니스트가 되지는 않았다.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1980년대에는 피아노 구입이 유행이었다. ‘한국예술연구’에 실린 박혜성의 논문에 따르면, 경제발전과 함께 당시 중산층들은 자녀들의 피아노 교육을 통해 계급상승 열망을 표출했다(‘한국 사회에서의 피아노의 문화적 의미’). 기억해 보면, 초등학교 친구들끼리 ‘체르니 몇 번까지 쳤다’거나 ‘소나티네까지 나갔다’는 걸 자랑삼아 얘기했다.
중산층의 대두에 따른 피아노의 보급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19세기 중산층이 등장하면서 피아노는 그들의 대표적인 ‘지위재(地位財)’가 되었다. 방 하나를 가득 채웠던 그랜드 피아노가 벽에 붙여서 놓을 수 있는 업라이트 피아노로 진화한 것도 중산층 가정에 피아노를 놓기 위해서였다. 이후 피아노는 식탁을 밀어내고 가정에서 가장 비싼 가구가 되었다. 중산층(문화적 의미로 ‘부르주아지’)에게 ‘문화와 교양’은 자신들이 귀족이나 평민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단 중 하나였는데, 그 과정에서 ‘예술’이 교육의 도구가 되었다(‘계급욕망의 유전자’, 서현).
피아노가 중산층의 문화와 교양을 증명하는 가구였다면, 도시적 차원에서 그 역할을 한 건 콘서트홀이었다. 그전까지 도시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시설은 귀족들을 위한 오페라하우스였다. 귀족들은 오페라하우스 객석 양쪽에 구획된 박스석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했고 건축가들은 화려한 양식으로 그런 과시를 뒷받침했다. 반면, 콘서트홀에서 평면의 형태는 잔향 시간과 관객들의 시선에 따라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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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들은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콘서트홀을 설계하여 새로운 기술과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콘서트홀을 비롯한 문화예술시설은 정치가들에게 자신들의 치적과 함께 도시의 문화 수준을 대외적으로 홍보하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한 도시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시설이 시민들이 접근하기 편한 위치에 지어지지 않고 사람들의 이목이 모이는 자리에 들어서는 이유다.
대한민국의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에도 시민들의 “문화 수요 해소 및 중부권 문화거。 형성”을 목적으로 세종예술의전당이 건립됐다. 위치는 세종시의 중심상업지역으로 계획된 나성동과 세종중앙공원이 만나는 지.이다. 현재는 많은 땅이 비어 있지만 언젠가 개발이 완료되면 빼곡히 들어찬 건물들을 배경으로 가장 앞에 서 있는, 눈에 띄는 자리다.
2013년 설계 공모를 통해 설계자로 선정된 DMP건축은 사람, 도시, 자연이 공존할 수 있도록 대지 중앙에 시민을 위한 광장을 조성했다. 그리고 건물 양쪽을 들어올려 날갯짓을 연상시킴으로써 문화의 파동이나 비상하는 형상을 전달하고자 했다. 설계안이 공개됐을 때 유려한 곡선의 지붕이 도시상징광장과 경계 없이 만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공공건축 수준을 고려했을 때 이 계획안이 어떻게 구현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세종예술의전당 기본설계가 진행되던 중 주변 개발계획 변화와 인구 증가 등을 반영한 타당성 재조사가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규모와 예산이 조정됐다. 결국, 설계 공모 후 6년이 지난 2019년에 착공됐다. 건축물이 지어지는 과정에서 초기 개념이 현실에 맞게 바뀌는 건 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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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나라 공공건축에서 그 변화는 개선보다 개악인 경우가 더 많다.
가장 먼저, 공연장의 규모가 700석에서 1000여석으로 늘어나고 무대 장치를 수용하는 플라이 타워(Fly tower)가 커지면서 전체적으로 육중해졌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의도했던 ‘날갯짓’, ‘파동’, ‘비상’과 같은 이미지는 사라졌다. 무엇보다 들어올려진 양쪽 부분 중 도시조직과 마주 보는 서쪽 하부에 계획됐던 야외갤러리가 삭제됐다는 건 아쉬운 변화다. 야외갤러리는 공연이 없는 시간대에도 광장을 오가고 공원을 산책하는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건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특별한 기능 없이 휑한 그늘을 만드는 지붕이 됐다. 그나마 원안을 살려 만든 수공간도 관리상의 이유로 물을 채워놓지 않는다.
공연이 없는 날에 시민들이 찾지 않는 세종예술의전당의 한계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2024년 기준으로 세종예술의전당의 총 이용자수는 6만5436명인데 모두 공연 관람 목적으로 방문했다. 주목할 만한 .은 총 이용자수 10위권 안에 드는 문화예술회관 중 공연만 열리는 곳은 없다는 사실이다. 모두 공연 외 전시, 예술교육 등을 병행하며, 일 년 중 240일 이상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반면 세종예술의전당은 65일이다.(‘2025 전국문화기반시설 총람’, 문화체육관광부. 단, 세종문화관광재단의 ‘2024년 운영실적’에 따른 공연일수는 125일)
세종시 특유의 도시 구조와 함께 보면, 세종예술의전당이 일 년 중 18% 정도밖에 운영되지 않는다는 。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 아직 개발 중이라고는 하지만 세종시는 밀도가 낮고 걸어서 이동하기 쉽지 않은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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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공원을 두고 도시조직과 주요 시설들이 그 주변에 배치되는 ‘환상형(環狀形·Ring) 구조’를 택했기 때문이다. 도시의 중심을 특정 권력이나 자본이 독。하지 않고 시민 모두가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공공의 영역으로 남겨 ‘평등’과 ‘분권’이라는 민주주의적 사상을 도시 그 자체로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 공감한다. 그렇기에 세종중앙공원 주변에 배치된, 세종예술의전당을 비롯한 공공시설들은 그 자체로 시민들을 끌어들이는 유인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은 ‘언제든 그곳에 가면 내가 누릴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세종시는 휑하다. 그래서 ‘도시상징광장’이 상징하는 것이 ‘텅 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텅 빔은 세종예술의전당 중앙의 광장과 양쪽으로 들어올려진 지붕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리고 공연이 없는 날, 건물도 그저 비어 있을 뿐이다. 반면, 세종예술의전당 건너편에 ‘예술의전당.’이라는 지.명을 달고 있는 커피전문。은 손님과 차로 가득하다. ‘가족친화형’ 콘셉트로 조성된 이 매장에는 200여권이 넘는 어린이 도서가 비치돼 있고 작가들과 협업한 예술작품이 전시돼 있다. 사기업 특유의 기민함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세종예술의전당에 적용할 수 없는 방식도 아니다.
거실에 있던 피아노는 아버지의 바람처럼 쓰이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건반 위 덮개는 덮여 있었고 그렇게 존재감을 상실하다가 결국 중고로 팔렸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베를린필하모닉의 연주를 들을 수 있고 ‘어쩌면 해피엔딩’의 스토리를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문화예술회관도 도시에서 양질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더 이상 아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예술회관은 시민들이 언제든지 가서 목적 없이 머무를 수 있는 ‘도시의 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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