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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한 개인의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사회와 연결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일을 한다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자주 존재의 증명을 ‘요구’받는 트랜스젠더에겐 더 그렇다.
다큐멘터리 연출을 전공한 남우 씨는 카메라와 장비를 다루는 ‘손 쓰는 일’에 매력을 느껴 자연스럽게 카메라 뒤에 서는 촬영감독이 되었다. 어릴 적에는 무엇이 됐든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었고, 고등학교 시절 UCC(사용자가 직접 만든 콘텐츠) 공모전, 콘테스트가 생겨나자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출품하기도 했다. 대학도 관련 학과로 진학하였고 지금은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세상을 담아내고 있다. 트랜스남성인 남우 감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남우 씨는 현재 프리랜서 촬영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인터뷰이 제공 사진)
새로운 장소와 관계 속으로 데려다주는 카메라
어렸을 때 운동을 했던 그는 특별한 장래희망이 있는 건 아니었다. 누나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자 덕분에 소위 ‘서울 맛’을 보게 됐다. “누나랑 두 살 차이가 나는데, 누나가 대학을 가고 나서 ‘서울은 정말 좋아’ 이러면서 누나 친구들도 소개해주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어요.(웃음) 부모님이 집 밖으로 나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분들이셨는데, 서울에 가면 자유롭겠다 싶었어요. 근데 운 좋게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오게 되었죠.”
대학을 졸업한 후엔 외주 작업을 하는 회사에 잠시 있다가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하며 촬영, 연출 일을 해 오고 있다. 남우 감독에게 지금 하는 일이 어떤지 묻자, 바로 “일을 진짜 좋아한다”는 말부터 나왔다. “촬영을 하면 내가 일상적으로는 가보지 못할 곳들을 가게 되잖아요. 카메라가 나를 여러 곳으로 데리고 간다고 생각해요. 그런 과정 속에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요. 그래서 할 수 있다면, 이 일을 정말 오래 하고 싶어요.”
지금 주력하고 있는 일은 다큐멘터리 촬영과 제작이다. 현재 6개의 프로젝트에 합류 중이라는 그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촬영, 특히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은 끊임없는 변수와 돌발 상황이 가득하다는 걸 알기에 어려움은 없냐고 물었지만 남우 감독은 오히려 그걸 즐기는 것 같았다.
“촬영 현장에서 비가 오면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예보에 없었던 비가 쏟아진 일이 있었어요. 100명이 넘는 스태프와 클라이언트가 대기하는 상황이었죠. 내가 연출이니까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그럴 땐 파도를 타는 서퍼들처럼 유연하게 움직여야 해요.”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상황들을 상상해 보고, 어떤 일이 일어나면 이렇게 대처해야겠다는 생각도 해 두지만, 현장은 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받을 법도 한데, 남우 감독은 “재미있지 않나요? 모험 같잖아요.”라며 웃었다. 타고난 현장 체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력적으로도 “아직은 힘들지 않다”고 했다. 학창시절 운동을 했기 때문에 “체력은 좀 있는 편”이라며, 열심히 일하고 싶은 의지를 드러냈다.
▲ 인터뷰를 하던 남우 감독의 앞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필통엔 트랜스젠더 플래그 뱃지가 달려있었다. ⓒ일다
일터에서 ‘트랜스남성’임을 미리 밝히는 이유
프리랜서 촬영감독 남우 씨는 일할 때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주변 동료나 감독들에게 미리 커밍아웃을 하고 일하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정체성을 애매모호하게 숨기며 속앓이를 하거나 서로 불편해지기보다는, 차라리 먼저 선언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안전하고 편안한 노동 환경을 만드는 생존 방법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을 세우게 된 데에는 과거 청계천에서 돌과 이끼를 닦는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의 경험이 이정표가 되었다. 당시 일을 소개해 준 친구는 남우 감독을 여성으로 알고 있었기에, 현장의 담당 소장에게 ‘여성 노동자 2명이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남우 감독의 겉모습을 본 소장은 의구심을 가졌고, 남우 감독이 스스로 성별을 밝히게 하려는 의도로 계속 질문을 던졌다.
“친구와 저한테 ‘너네 둘이 닮았다’ 이런 말을 했어요. ‘너네가 자매인지, 남매인지 밝혀라’라는 의도였던 거죠. 그런 질문들이 이어지다가 결국 어느 날 소장님이 저한테 ‘미스 OO’라는 단어로 불렀을 때 ‘아,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일하러 갔던 친구한테 ‘소장님이 성별 호칭으로 부르는 게 불편하다. 이야기를 할지 말지 고민이 된다’고 했더니, 친구가 ‘대신 말을 전해주겠다’고 용기를 내줬어요.”
그 일은 남우 감독한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게 오히려 편하구나. 큰일이 생기지 않는구나 알게 된 거죠.”
또한 남우 감독은 박한희 변호사가 자신을 소개할 때 ‘트랜스여성’이라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모습을 보며 용기와 자긍심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박한희 인터뷰 기사: 내 정체성을 밝혀도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았어요 https://www.ildaro.com/10379)
“한동안 나를 소개할 때 그냥 ‘남성’이라고 했었어요. 내가 ‘남성’이 아니고 ‘트랜스남성’이라고 말하는 게 스스로 조금 불편하고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박한희 변호사 이야기를 듣고 달라지게 되었어요. 요즘 박 변호사를 촬영하는 프로젝트를 하나 하고 있는데요. 만났을 때 한번 물어봤거든요. ‘변호사님은 자기를 소개할 때 여성이라고 해요? 뭐라고 하세요?’ 라고요. 그러니까 ‘트랜스여성이라고 한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그게 가장 정확한 말이잖아요. 그 말을 듣고 ‘그렇네, 그냥 그렇게 말하면 편해지겠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남우 감독은 자신의 정체성에 가장 솔직하고 정확한 단어를 선택해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오히려 일상과 일터의 관계 속에서 오해를 줄이고 스스로를 편하게 만드는 방법임을 몸소 경험하며 배웠다.
개명을 마쳤지만, ‘성별 정정’이라는 문턱은 높아
남우 감독은 여러 경험을 통해 노동자로서 최대한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지만, 여전히 많은 트랜스젠더 노동자가 각자의 이유로 일터에서 성별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간다. 시스젠더(비트랜스젠더) 사회에 녹아들어 살아가는 삶은 극심한 정신적 긴장과 피로를 동반한다. 평범한 대화 속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군대 이야기나 신분증 확인 등은 트랜스남성 노동자들에게 정체성을 증명하거나 혹은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남우 감독은 현재 이름을 개명한 정도의 트랜지션만 진행한 상황으로, 법적 성별 정정을 원하고 있다. 다행히 개명을 마친 후 병원이나 공항 등 일상 공간에서 전처럼 가슴 졸이지 않고 자신의 이름이 불릴 수 있게 되었지만, 법적 성별 정정을 완료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남우 감독은 성별 정정을 위한 수술과 호르몬 치료 등을 고려하고 있고, 이를 위한 경제적인 부분도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6개의 프로젝트 외에 제 작업도 하고 있으니까요. 일정이 겹치지 않게 제 촬영 캘린더를 동료들에게 다 공유하고 있거든요. 빈 시간에 일을 집어넣는 거죠.(웃음)”
바쁜 와중에 취미 생활도 가끔은 즐긴다. 특히 ‘아저씨 모임’이라고 부르는 트랜스남성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즐겁다. “당구 칠 줄도 모르면서 무작정 당구장에 가고, 함께 낚시하러 떠나기도 해요.” 남우 감독에게 이들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친구이자, ‘선배’ 트랜스남성으로서 경험을 공유받을 수 있는 든든한 동료이기도 하다.
▲ 남우 씨는 카메라를 든 그만의 독보적인 시선과 해석을 인정받는 “대체 불가능한 노동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인터뷰이 제공)
지난 시간들이 나를 좀 더 괜찮은 남성으로 만들었을 것
성별 정정을 마치고 나면 신분증 상의 성별이 바뀐 상태로 아주 사소한 일상적 권리(민증을 보여주고 편의.에 가보는 일 등)를 새로이 누려보고 싶다는 남우 감독에게,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나 아쉬움은 없는지 물어봤다.
“여자 중학교를 나왔는데, 성별 정정 이후에도 그 기록은 남는 거니까 완벽한 전환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하지만, 트랜지션을 한다고 해서 새로 태어나는 게 아니고, 내가 지내온 시간은 여전히 지난 시간으로 남겠죠. 거기서 쌓인 부분도 있을 테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그 시간들이 나를 좀 더 괜찮은 남성으로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사실 (정체화 이후) 한동안 ‘여혐’을 한 시기도 있었어요. 그때는 ‘진짜 남자’가 되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게 ‘남성성’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근데 그걸 한 발자국 떨어져서, 거리두기를 하고 보니까 너무 못나 보이더라고요. 내가 정말 ‘하남자’(下男子)인 거에요. 그때 정신을 차리게 됐어요.”
남우 감독은 이제 그런 허구의 ‘남성성’에 매달리지 않는다. 가까이 지내는 시헤남(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 남성) 친구들은 군대를 못/안 가거나, 소위 사회가 말하는 ‘정상적인 남성 사회’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다. 남우 감독은 자신이 ‘시헤남’으로 태어났더라도 아마 지금의 친구들과 함께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 남우 감독은 자신만의 삶을 꾸리는 방식을 찾은 것이다.
앞으로 노동자로서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도 던졌다. 그의 대답은 명확하고 우직했다. “촬영 현장에서 ‘내가 아니면 이 장면을 찍을 수 없다’는 평가를 받는 ‘대체 불가능한 노동자’가 되고 싶어요.”
단순히 지시를 받아 기술적으로 촬영을 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를 든 그만의 독보적인 시선과 해석을 인정받는 예술적 촬영 노동자가 되겠다는 열망이다. 그는 미래에 커다란 극장 스크린에서 자신이 정성껏 찍어낸 작품을 관객들과 함께 바라보는 자부심 넘치는 순간을 꿈꾼다. 현재 연출자로서 진행하고 있는 작업 또한 마찬가지다. 인터뷰를 하며 남우 감독이 앞으로 만들어낸 많은 창작물들을 기대하게 됐다. 그가 보여줄 세상이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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