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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건을 보고 소름이 돋았죠. 데자뷔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백영준 한국산업안보학회장은 2005년 SK하이닉스 낸드플래시 기술유출 시도 사건과 2023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복제 시도 사건을 나란히 놓고 이렇게 말했다. 18년의 시차가 있었지만 구조는 판박이였다. 핵심 인력을 빼내고, 이들이 몸으로 익힌 공정·생산 노하우를 활용해 중국에 한국 반도체 공장을 옮겨 심으려 했다.
백 회장은 산업보안 분야에서 보기 드물게 이론과 실무를 두루 갖춘 전문가로 꼽힌다. 2003년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 설립 초기 멤버로 참여했고, 2005년 SK하이닉스 사건에선 산업스파이 적발을 주도했다. 지난 30일 첫 언론 인터뷰에 응한 그는 “수법은 정교해지고 디지털화됐지만 본질은 똑같다”며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술은 결국 사람을 통해 이동한다”고 말했다.
백 회장은 기술유출 사건에서 사람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공정 기술은 사람이 가서 해줘야 한다”며 “해본 사람이 아니면 문서만 가지고는 알기 어려운 ‘손맛’이 있다”고 했다. 공정 기술은 문서만으로 양산하기 어렵고, 숙련 엔지니어가 시행착오 끝에 익힌 경험과 노하우까지 함께 넘어가야 완성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백 회장은 처벌 강화만으로 기술유출을 막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봤다. 승진 누락과 보상 부족, 불공정한 평가 등 조직에서 느낀 박탈감이 외부의 파격적인 제안과 맞물리는 순간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보안의 약한 고리로 협력업체를 꼽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대기업과 달리 생산라인을 함께 운영하는 장비·소재 협력업체는 핵심 공정에 접근하면서도 보안 투자와 인력 보상 여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있어서다. 요즘처럼 대기업의 실적과 보상이 크게 뛰는 시기에는 협력업체 직원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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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회장은 “산업보안의 출발。은 감시가 아니라 인재 존중”이라며 “직원이 회사를 떠나는 이유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최고의 보안 대책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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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막연한 책임 대신 명확한 기준 제시해야”
핵심 기술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퇴직자의 이직과 지식 활용을 지나치게 막아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어디까지가 개인이 경력을 통해 쌓은 지식과 경험이고, 어디부터가 기업의 영업비밀인지 경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기술유출 대응이 원시적이고 감정적으로 흐르는 측면이 있다”며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기업이 구체적으로 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기술과 경험을 포괄적으로 묶어 놓은 뒤 문제가 생기면 처벌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취지다.
이 교수는 과거 IBM에서 퇴사할 당시 경험을 예로 들었다. 그는 “IBM에서 나올 때 50페이지에 사인했다. 그 50페이지에 적힌 것만 하지 않으면 됐다”며 “그런데 국내에선 회사에 피해를 줄 경우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식으로 뭉뚱그려 놓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회사 내부에서도 기술의 경계를 좀 더 촘촘하게 나눠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이병훈 전 삼성전자 부사장은 기술의 중요도에 따라 등급을 세분화하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정보 접근을 허용하는 ‘니드 투 노(Need-to-know)’와 ‘최소 권한 원칙’을 철저히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권한을 조각조각 나눠놓으면 한 사람이 전체 기술을 다 알 수 없으니 유출되더라도 타격이 줄어든다”고 말했다.
퇴직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도 중요하다. 오랜 기간 한 분야에서 일한 엔지니어일수록 자신이 체득한 경험·노하우와 회사 기밀의 경계를 혼동하기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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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전 부사장은 “퇴직자들에게도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정보는 기밀이라는 인식을 정기적으로 심어주는 사전 예방 조치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현재 산업기술 보호 기능은 국정원과 경찰·지식재산처·중소벤처기업부·산업통상부·방위사업청 등 여러 기관에 나뉘어 있다. 백 회장은 “정보·정책·수사·기업 지원을 한데 조율하는 경제안보 차원의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외로 빠져나가는 인재를 지키는 데서 나아가 해외 핵심 인재를 적극적으로 끌어와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김민배 인하대 명예교수는 중국의 해외 인재 유치 프로젝트인 ‘천인계획’에 빗대 한국도 ‘역(逆)천인계획’을 짜야 한다고 제안했다.
메모리 반도체처럼 한국이 앞선 분야에서는 핵심 기술과 인력을 지키되, 반도체 설계나 양자 컴퓨터 등 중국이 앞선 분야에서는 현지 핵심 인재를 적극적으로 영입하자는 주장이다. 김 교수는 “중국도 내부 정치나 경쟁, 이른 정년 등으로 능력이 있어도 조직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이 많다”며 “새로운 기회를 찾는 중국 인재를 적극적으로 탐색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 “기술은 훔쳐도 생태계는 못 훔친다”…대만의 ‘자동 방화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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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하나를 훔친다고 산업 전체를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황친융(콜리 황·黃欽勇) 디지타임스 회장은 지난 15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대만의 기술유출 문제를 이렇게 봤다. 40년간 대만 전자산업을 분석해온 그는 대만 역시 중국 등으로의 기술·인재 유출을 우려하지만, 개별 사건이 산업 전체를 흔들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진단했다. 파운드리와 설계·후공정·서버 등 산업 생태계가 여러 층으로 분산돼 있어서다. 그는 “한국의 진짜 취약.은 인재 이탈보다 메모리 중심의 기술·사업 포트폴리오 집중”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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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회장은 TSMC의 강력한 방어막도 단순한 보안 규정이 아니라 복잡한 조직과 사업 구조에 있다고 설명했다. TSMC의 연구개발 인력은 2000년 무렵 약 200명에서 현재 1만1000명 수준으로 늘었다. 고객은 500곳이 넘고, 서로 다른 공정을 다루는 프로젝트와 팀도 500~600개에 이른다. 한 엔지니어가 회사 전체 공정과 노하우를 파악하기 어려운 구조다. 그는 “예전에는 팀이 8개 정도라 서로 무엇을 하는지 알기 쉬웠지만 지금은 팀 간 소통조차 쉽지 않다”며 “조직 자체가 일종의 자동 방화벽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일부 기술을 손에 넣는다고 생산능력까지 곧바로 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황 회장은 “칼을 훔쳐도 그 칼이 좋은지, 언제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를 수 있다”고 비유했다. 기술 자체뿐 아니라 이를 양산에 적용하는 노하우와 공급망, 고객 관계 등 축적된 생태계가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의미다.
중국의 기술 확보 공세가 거세지면서 대만 정부도 제도적 방어선을 높이고 있다. 2022년 국가안전법을 개정해 국가핵심기술의 해외 유출을 경제간첩 행위로 처벌할 수 있도록 했고, 2025년 TSMC 2나노 기술유출 사건과 2026년 ‘블루오션 프로젝트’ 수사에서 관련 조항을 잇따라 적용했다. 황 회장은 “미·중 관계 악화로 대만이 중국과 기술교류를 줄이고 제3국 협력을 늘릴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다만 황 회장은 기술유출을 막는 것만으로 경쟁력을 지킬 수는 없다며 ‘정공법’을 강조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계속 새로운 기술과 사업모델을 만드는 것”이라며 “기존 기술을 지키는 동시에 남들이 쉽게 복제할 수 없는 다음 기술을 앞서 개발하고, 지식재산권과 국제 규칙을 지키는 생태계를 주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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