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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초 미국 대학들은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학기말 고사와 성적 입력이 일제히 몰리는 시기에 대학교 내 성적 관련 전산 시스템이 모조리 다운돼버렸다. 자칭 ‘빛나는 사냥꾼(ShinyHunters)’이라는 해킹 그룹이 교육 정보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캔버스라는 교육 관리 플랫폼을 해킹했기 때문이다.
하버드, MIT, 스탠퍼드, 프린스턴, 컬럼비아, 코넬, 버클리, 조지타운 등 유수의 대학을 포함해서 대거 희생양이 됐다. 전 세계적으로 약 9000개에 가까운 교육 관련 기관이 희생양이 됐다. 캔버스를 소유한 인스트럭처라는 회사는 결국 항복하고 ‘익명의 중개인’과 ‘모종의 거래’를 한 후 문제를 해결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해킹 피해와 그에 따른 정보 유출은 이제 예외라기보다는 일상에 가깝다. 대학은 물론이고 신용카드사부터 쿠팡까지 안 털린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국민의 프라이버시는 이제 더 이상 ‘민감 정보’가 아니라 해커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공공 정보’로 전락해버렸다. 국민은 분노 대신 체념을 배웠다.
그럼에도 지난 9월 말 터진 금융권 AI 해킹은 무뎌질 대로 무뎌진 우리 국민에게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경악이었다. 철통 보안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은행이 뚫렸기 때문이다. 신한은행, KB국민은행, 하나은행. 가히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은행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항변하기도 한다. 자체 핵심 전산망이 뚫린 것이 아니라 주변 시스템이 뚫린 것이라고.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위 대학 해킹 사례에서 어떤 대학이 ‘우리 대학 전산망이 뚫린 것이 아니라 캔버스라는 외부 시스템이 뚫린 것’이라고 하면 교수와 학생들이 잘했다고 손뼉을 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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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킹이 언제나 보안 전문가들이 외면하는 사각지대를 이용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인과관계 입증 핑계로 꼬리자르기 불 보듯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은행 책임론과 관련해서 나오는 법조계 쪽 논리다. 일부 법률 전문가들은 은행의 배상 책임과 관련해 전형적인 ‘과실 책임’의 시각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이 시각에 따르면 먼저 구체적인 피해가 발생해야 하고, 다음으로 은행의 과실이 존재하고, 그 과실이 피해로 연결되는 인과 관계가 성립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은행의 과실이 사회적으로 비난 가능한 정도여야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피해자가 이 모든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런 과실 책임의 법리로 이번 사건 규율dl 가능할까? 아마 안 될 것이다. 정보 유출의 피해는 직접적인 것뿐만 아니라 파생적인 것, 즉 제2차 피해가 중요한데 은행은 여기서부터 꼬리자르기를 할 것이다. 인과관계 입증이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은행이 믿는 최후의 보루는 비난 가능성 부분이다. ‘우리는 할 만큼 했다. 국가가 주관하는 보안검사도 다 통과했다. 그것도 최우수 등급으로. 하라는 것은 다 했는데도 사고가 난 걸 나 보고 어쩌라는 것이냐’, 이런 식의 배 째라 논리가 의외로 법원에서 먹힐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과실 책임의 논리로 규율해서는 안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은행권 해킹에 따른 책임은 ‘무과실 책임’ 또는 ‘엄격 책임’의 시각에서 규율해야 한다. 피해가 발생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은행이 배상하는 것’이 그것이다.
왜 그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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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의 근저에는 은행 제도가 현대 신용 사회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도사리고 있다. 그 전제조건은 ‘사회적 신뢰’다. 은행은 신뢰를 판매하는 곳이다. 이 。을 정확히 이해해야 이번 사건의 파장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현대 신용사회에서 은행은 요구불 예금이라는 신용 화폐를 공급한다. 요구불 예금이란 은행이 발행한 일종의 빚문서다. 사람들은 이 빚문서를 법화 대신 일상생활에서 화폐로 사용한다. 그런데 은행이 이 빚문서를 화폐로 통용시킬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신뢰 때문이다. 언제나 법정 화폐로 교환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건 은행에 대한 신뢰가 훼손될 경우 은행이 발행하는 요구불 예금은 그냥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다.
유출 그 자체로 처벌하고 배상하게 해야
이제 금융권 AI 해킹에 따른 은행의 배상 책임 문제로 돌아가 보자. 만일 은행이 돈 좀 아끼려고 “나는 배상 책임 없어. 내가 노력 안 한 것도 아니고 하라는 것 다 했어. 설사 내 노력이 조금 부족했다고 해도 그것이 이번 손해로 직결되었다는 증거도 없잖아” 이런 식으로 꼬리 자르기를 하고 법·제도가 이런 주장을 수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민감 정보는 계속 줄줄 새고 예금자들은 손해를 입지만, 이런저런 걸림돌 때문에 제대로 된 배상을 받지 못하게 된다. 사람들은 결국 그 은행을 외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은행을 외면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그 은행에서 돈을 뺀다는 뜻이다. 은행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사태인 예금인출이 발생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한 은행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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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모든 은행이 이런 면피성 주장을 한다면 국민은 예금 통화 그 자체를 불신하게 될 수도 있다. 그때는 우리나라의 신용 경제 자체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그게 뭐가 문제냐? 어차피 이번 기회에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CBDC)로 이행하면 될 것 아니냐”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뱅크 런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중앙은행이라고 AI 해킹으로부터 무풍지대가 아니라는 .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5월에서 6월 사이에 한국은행 직원 186명의 개인정보가 해킹으로 유출됐다. 이번에도 외부 위탁업체가 뚫렸다. 그런데 지금은 일반 개인과 한국은행 간 접.이 매우 제한적이지만 한국은행이 은행을 뛰어넘어 직접 개인을 상대로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하면 그 보안 위험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10월 14일 현재, 감독 당국의 자료에 따르면 이번 금융권 AI 해킹 사고로 은행, 저축은행 등 가히 전 금융권을 망라해 총 16개 금융회사에서 약 10만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그래도 감독 당국은 계좌번호나 카드번호 등은 유출되지 않았다고 덧붙인다. 유출과 피해 간의 인과관계를 끊으려는 노력이 눈물겹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된다. 피해 여부와 무관하게, 또 과실 여부와 무관하게 유출 그 자체를 문제 삼아 처벌하고 배상하도록 해야 한다. 해당 금융회사의 책무구조도에 따라 관리 책임이 있는 모든 인사를 징계하고, 금융위원회가 이를 주저하면 금융위원장도 갈아치워야 한다.
폭풍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걸 막지 못하면 가래로도 못 막는다. 대통령과 국회는 이번 상황을 절대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성인 전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과 피해 간의 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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