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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漁港)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지.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낮의 통영이 햇살에 반짝이는 수채화라면, 밤의 통영은 물 위에 번지는 유화와 같다.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통영은 조선 최고의 명품 공예도시였고, 미식(美食)의 도시였다. 그런가 하면 작곡가 윤이상, 시인 유치환, 김춘수, 화가 이중섭과 전혁림 등이 활동했던 예향(藝鄕)이기도 하다. 충무공이 만든 해군도시 통영은 어떻게 ‘맛과 멋’의 도시가 됐을까. 1박 2일 통영 이순신학교에서 그 비밀을 찾아 나섰다.》
● 통영 이순신 학교
통영과 마주보고 있는 미륵산.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오르자 햇빛이 부서지는 바다 위에 동동 떠 있는 섬들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맑은 날이면 일본 대마도까지 보이고, 서쪽으로는 남해와 광양, 하동 너머로 여수 돌산대교까지 일망무제다.
바로 앞에 보이는 통영반도와 거제 사이 좁은 바다는 견내량(見乃梁)이다. 1592년 음력 8월 14일. 한산도 제승당에 있던 이순신 장군은 부산에 상륙해 거제를 거쳐 호남으로 가려던 왜선에게 배 몇 척을 보내 유인했다. 왜선들이 좁은 내해로 쫓아오자, 학이 날개를 펼치듯 순식간에 좌우로 포위했다. 학익진(鶴翼陣)! 그리고 기다림. 견내량의 물살은 하루에 두 번 방향을 바꾼다. 들어올 때는 쉽게 들어왔지만, 조류가 바뀌면 포위된 배들은 도망갈 물살조차 없다. 왜선 쉰아홉 척이 부서졌고, 마흔일곱 척이 가라앉았다. 장군은 화력 싸움에 앞서 바다의 물살과 시간표를 통제했고 결국 ‘승리를 제조(制勝)’했다.
통영은 제1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만든 천혜의 요새 신도시였다. 대마도에서 거제, 남해, 광양, 하동, 여수까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미륵산은 최고의 망루였고, 통영 앞바다 500개가 넘는 섬은 하나하나가 성벽이었다. 조선 수군이 매복할 수 있었던 섬 사이의 좁은 물길은 왜국에겐 죽음의 협곡이었다. 충무공은 한산도 제승당에서 3년 8개월을 머물렀고, 난중일기의 대부분이 이 바다에서 쓰였다. 제6대 통제사 이후 통제영은 현재의 통영반도로 확장 이전했다.
통영은 도시 전체가 이순신 학교다. 국가유산청과 경상남도, 통영시가 주최하는 ‘2026 생생국가유산사업’의 이름도 이순신 학교다. 1박 2일간 통제영과 12공방을 둘러보고, 배를 타고 한산도 제승당과 통영운하를 둘러보는 여행(1인 5만 원)을 하다 보면 충무공의 전략과 리더십, 애민정신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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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제승당과 통제영 세병관을 둘러보면서 현판에 새겨진 의미를 되새겨보았다. 이순신 장군이 수루에 앉아 있던 한산도 제승당(制勝堂)의 원래 이름은 운주당(運籌堂)이었다. 세병관에도 운주당이 복원돼 있다. 운주당의 ‘주(籌)’는 주판에 쓰는 한자다. 요즘으로 치자면 컴퓨터 ‘워게임(War Game)’을 통해 치밀하게 계산하며 필승 전략을 짜내는 집이다.
제승당의 ‘제승(制勝)’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승리(Victory)를 컨트롤(control)하고, 제조(Making)하는’ 집이다. 명량, 한산, 노량…. 충무공이 싸웠던 바다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망과 백성들의 목숨이 달린 전쟁터였다. 바람과 물길과, 적의 숨결까지 완벽하게 손안에 쥐고 승부를 요리하겠다는 장군의 의지가 담긴 이름이다.
통제영에서의 공연, 거북선 내부 관람, 한산도 제승당 방문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지만 가장 인기있는 코스는 통영 밤바다 해상택시 탑승이다. 탑승장은 통영국제음악당 부근에 있는 도남관광지 달보드레 쉼터. 해질녘 출발한 해상택시는 붉은노을 속으로 들어간다. 통영국제음악당과 공주섬, 조선소의 신비스러운 실루엣이 펼쳐진다.
스피드 보트가 강구안으로 들어서자 황금색 조명이 들어온 통제영 세병관이 산중턱에서 밝게 빛나고 있다. 동피랑 언덕 위 망루의 불빛도 선명하다.
호수처럼 잔잔한 강구안에는 거북선과 판옥선으로 구성된 조선의 군선이 당당하게 정박해 있다. 배가 강구안을 한 바퀴 돌자 식당가 간판 조명에 비친 울긋불긋한 파도가 크게 일렁인다. 고흐가 그린 통영의 유화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항구를 빠져나온 배는 천천히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통영운하다. “통영 제1의 야경 포인트”라는 선장의 말이 과장이 아니다. 화가 전혁림의 통영항 그림이 그려진 충무교의 교각을 지나가자, 시시각각 변하는 통영대교의 아치 조명이 눈앞에 펼쳐진다.
미륵도는 원래 통영반도와 붙어 있었다. 좁게 이어진 협곡엔 만조 때면 너비 10m쯤 되는 바닷물이 살짝 넘어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통영에서 여수로 향하는 지름길인 통영운하를 파면서 미륵도는 섬이 됐다. 통영운하에는 당포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에게 쫓기던 왜선들이 밤새 이 협곡의 모래바닥을 파내 길을 내고 도망쳤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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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말로는 ‘판데목’이라 부르는데, 왜군 시체가 수없이 가라앉은 자리라 하여 ‘송장나루’라 부르기도 했다. 판데목이 바라보이는 언덕에는 충무공을 모신 최초의 사당인 착량묘(窄梁廟)가 있다.
일제강。기에 판데목에 통영운하가 건설됐고, 바다 밑에는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이 뚫렸다. 해저터널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관직을 따서 ‘태합굴(太閤窟)’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의 군대가 모래를 파다가 죽어 나간 자리. 일제가 끝내 운하와 해저터널을 뚫고 토요토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후 지상에 충무교와 통영대교까지 놓였으니 판데목에는 물길과 해저터널, 다리까지 ‘삼중 교통로’가 생겼다.
다음날 아침 6시. 미륵도 미수해안길에 있던 숙소에서 통영 강구항까지 서호시장, 중앙시장, 세병관을 한 바퀴 도는 왕복 10km 러닝을 했다. 통영운하는 해저터널을 달려서 건너보았다.
바닷물 아래 10m 지。을 지나는 해저터널은 길이가 438m. 터널 양쪽 입구에는 ‘용문달양(龍門達陽·용궁 문을 지나면 밝은 세상이 나온다)’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소설가 박경리는 “임진왜란 때 몰살을 당했던 왜병들 원혼의 신음이었는지, 바다 밑의 울림소리가 들리는 터널”이라고 표현했다. 통영시는 이 보행용 해저터널을 디지털 미디어 전시 공간으로 꾸미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 통영 12공방과 나전칠기 체험
동피랑 골목에서 멀지 않은 통영 멘데마을 지식공방. 58년 동안 나전칠기 작업을 해온 정찬복 장인의 공방이 있다. 이 곳에서는 장인에게 나전칠기를 배우는 일일 체험도 열린다. 기자도 보석함에 천연아교를 바르고, 전복과 소라 껍데기로 만든 나전 조각을 오리고, 끊고, 붙이는 나전칠기 체험을 해보았다. 사슴과 소나무, 보름달과 풀, 바위 등의 모양의 나전 조각을 핀셋으로 집어 세밀하게 붙여 나가는 과정은 정신 수양에 가까웠다.
한 시간 넘게 작업한 결과 보석함의 조그만 동그라미 속에 나만의 산수화 풍경을 완성했을 때, 그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장인의 작업실에는 나전의 재료가 되는 전복, 소라, 진주조개껍데기를 볼 수 있는데, 그중에는 뉴질랜드산 전복, 멕시코 조개 등 외국에서 수입해 온 대형 조개껍데기도 대형 조개껍데기도 있다. 바야흐로 글로벌 시대. 요즘 나전칠기에는 온 지구의 바다가 담겨 있다.
통영 곳곳에는 나전칠기뿐 아니라 옻칠, 갓, 누빔, 대렴(대나무발) 등 다양한 공예 체험을 할 수 있는 공방과 전시장이 많다. 이는 통제영에 있던 ‘12공방’의 전통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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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도의 수군이 전쟁에 나서려면 배 뿐이 아니라 무기와 병장기, 갑옷과 군복도 필요했다. 이런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해 가죽, 누빔, 철, 갓, 대렴, 나전 등 수많은 공방이 통제영 안에 빼곡히 들어섰다.
전국의 장인들을 불러모아 만든 분업과 품질 관리 시스템을 갖춘 생산 클러스터. 요즘으로 치자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같은 ‘첨단 산업 단지’였다. 12공방은 。차 왕실 진상품과 사대부 생활용품까지 만드는 곳으로 발전했고, 생산품은 ‘조선의 에르메스’같은 럭셔리 대접을 받았다. 통영갓은 밟아도 찌그러지지 않는 갓으로 유명했고, 통영 나전칠기, 소반, 부채, 장석 등은 한양 사대부 사이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명품이었다.
최재일 통영문화재단 본부장은 “통영 12공방이 조선 최고 공예의 전통을 발전시켰다면, 팔도의 조리법이 결합된 통영의 미식 문화도 꽃피우게 된 계기가 됐다”고 설명한다. 2∼3년 임기로 부임한 통제사들은 궁중음식과 한양의 요리법을 소개했고, 전라·충청·경상도 출신의 요리사들이 통영산 최상급 원재료와 만났다. 담백한 통영나물비빔밥부터 맑게 끓이는 봄의 도다리쑥국과 겨울의 물메기탕, 화려한 메뉴가 총출동하는 다찌식당…. 맵고 짠 자극적 양념이 없이도 향긋한 바다와 육지의 식재료 본연의 맛을 섬세하게 살리는 통영의 요리는 늘 여행객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 힙스터들이 모여드는 통영
“한산할 때 떠나는 한산도, 욕봤다 싶으면, 욕지도.”
통제영 앞 거리에 있는 ‘통영 아가씨클럽(Agacci Club)’은 요즘 통영에서 가장 핫한 로컬 브랜드 굿즈 숍이다. 굴 모양 하트로 ‘I♡TY(통영)’를 새긴 티셔츠, 장어와 멍게 등 통영의 수산물을 캐릭터화한 옷을 진짜 생선처럼 랩으로 포장해 스티로폼 용기에 담아서 판다. 물고기 모양의 넥타이는 파티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인싸템’이다. 통영의 수많은 섬과 수산물 하나하나에 붙인 카피는 기발하다. “이게 뭐야? 재밌네!”라는 반응과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자연스럽게 통영이 더욱 궁금해지게 만드는 굿즈들이다.
강구안에 있는 로컬스티치 통영에는 지역의 젊은 어부와 창작자들이 협업해 신나는 콘텐츠를 만들어낸다. 1층엔 카페에서 ‘강구안 바다라떼’를 주문하면 통영의 바다처럼 반짝이는 코발트빛 커피를 마실 수 있다. 그 옆에는 지역에서 3대째 장어 잡이를 하는 젊은 어부가 잡은 장어를 팔고, 그 옆에는 그 장어를 예쁘게 캐릭터화한 티셔츠와 키링을 판다. ‘로컬은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힙한 오리지널리티’라는 사실을 통영은 다시 한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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