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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한옥마을 전경
ⓒ 양진형
올해 추석 전, 서울에 사는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명절을 끼고 10여 일간 히말라야 여행이 계획되어 있어 이번에는 집에 내려오지 못하겠다는 얘기였다. 아내는 "엄마 아빠 걱정하지 말고 무사히 다녀오라"며 딸을 격려했다. 그게 내심 마음에 걸렸던지, 딸은 히말라야에서 돌아온 뒤 한글날 즈음에 전주 여행을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1박 2일 전주 여행이 시작됐다.
사실 우리 부부가 딸과 여행을 떠나는 것은 10여 년 전 코타키나발루 이후 처음이다. 그사이 우리 가족에겐 큰 변화가 있었다. 내가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전남 여수로 낙향하면서 아들 내외와 손주, 딸을 볼 기회가 그만큼 줄었다. 잘해야 서너 달에 한 번 얼굴을 보는 사이가 되다 보니, 가끔은 마음 깊은 곳에서 헛헛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30대 중반 딸이 짠 일정표, '전주를 몰랐구나' 싶었다
그런 터라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직장 생활에 바쁜 딸과의 여행이 더욱 기다려졌다. 딸은 여행 이틀 전 시간대별 일정표를 보내왔다. 전주에 서너 번 와본 터라 이 도시를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일정표를 보니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꽃으로 유명한 덕진공원과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모신 경기전을 빼면 가본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일정표에는 맛집과 카페, 명소, 체험 거리가 알차게 담겨 있었다.
▲ 전주 카페
ⓒ 양진형
여행 당일 오전 10시 20분, 딸이 기차로 전주역에 도착했다. 여수에서 승용차로 출발한 우리 부부는 딸을 태우고 한옥마을 인근 숙소로 향했다. 차를 세워두고 한옥마을 투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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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일 오전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딸은 "주말이면 발 디딜 틈이 없는 곳"이라고 귀띔했다.
막 물들기 시작한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 전망 좋은 카페에서 향 짙은 커피를 한 잔 마신 뒤, 이성계의 어진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경기전(慶基殿)으로 향했다. 수학여행을 온 다문화가정 학생들과 외국인 관광객이 꽤 많았다. 삼삼오오, 또는 가족 단위로 한복을 입고 한옥마을과 경기전 곳곳을 둘러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경기전 옆 어진박물관에서는 이성계뿐 아니라 세종, 영조, 단종 등의 어진도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한옥마을, 경기전, 전동성당... 전주 여행의 '성지'들
이어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터인 전동성당을 찾았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윤지충(바오로)은 모친상에서 천주교 교리에 따라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아 유림의 극심한 비난을 받았다. 결국 윤지충과 외사촌 권상연(야고보)은 이곳에서 참수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전동성당은 호남 천주교의 모태 본당이자 전교의 발상지로, 신자뿐 아니라 많은 여행객이 찾고 있었다.
▲ 전주 전동성당
ⓒ 양진형
전동성당을 나와 전주천을 가로지르는 청연루와 전주향교를 둘러본 뒤, 오후 5시부터 1시간 동안 예약해 둔 싱잉볼 명상 프로그램에 참여하려고 한옥마을 인근 '리탐바라 웰니스'로 향했다.
이곳은 사전예약으로 전주시민과 여행객에게 명상 클래스를 운영한다. 명상 경험이 없는 초보자나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도록 꾸려진 프로그램이다. 이날 오후 5시 수업에는 우리 가족 세 사람과 외국인 부부까지 모두 다섯 명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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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상 클래스의 씽잉볼
ⓒ 양진형
명상이라면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곳에서는 편안히 누워서 진행했다. 은은한 조명과 부드러운 싱잉볼 소리에 몸과 마음의 긴장이 금세 풀리는 듯했다. 세션이 끝난 뒤 아내는 "당신, 잠깐 살짝 잠든 것 같더라"며 웃었다.
가성비 '전주막걸리 한상차림', 그리고 1년 만에 푼 금주
이색 명상을 마치고 첫날 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전주막걸리 한상차림' 집으로 향했다. 예전만 못하다는 친구의 말에 걱정했는데, 저녁 6시 30분께 들어선 막걸릿집은 소문과 달리 벌써 북적이고 있었다.
4인용 탁자가 가득 찰 만큼 다양한 안주가 나왔고, 우리는 삼합까지 따로 주문했다. 딸이 건넨 건배 제의에 나는 1년간 지켜온 금주의 봉인을 끝내 풀고 말았다. 막걸리 한 주전자에 한 병을 더 시켜 마시고, 불콰해진 얼굴로 가게를 나섰다.
2차는 딸의 계획대로 택시를 타고 전주천변의 칵테일바로 갔다. 손님은 연인, 친구, 혼자 온 이들까지 대부분 20~30대였다. 생소한 칵테일의 세계를 맛본 뒤 마지막 목적지인 LP카페로 향했다.
발걸음을 멈추게 한 임지훈의 '꿈이어도 사랑할래요'
꽤 쌀쌀한 가을밤, 머플러를 두르고 전주천 청연루 근처에 이를 즈음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려왔다. 나이 지긋한 버스커(busker)가 부르는 노래였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임지훈의 '꿈이어도 사랑할래요'였다.
▲ 청연루 앞에서 공연하는 버스커
ⓒ 양진형
우리 가족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멈추고 박수로 추임새를 넣으며 텅 빈 객석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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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커는 노래 사이에 "격려해 주시니 큰 위로가 된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평소 내게서 '짠돌이'라고 핀잔을 받던 아내는 배춧잎 한 장을 슬그머니 모금통에 넣었다.
달콤한 노래를 뒤로하고 들어선 LP카페도 빈자리 없이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디스크자키 뒤편으로 어림잡아 수천 장은 되어 보이는 LP판이 빼곡했다. 그는 신청곡이 들어오는 순서대로 LP를 찾아 틀면서, 노래를 부른 가수와 당시 가요계 이야기를 곁들여 들려주었다. 어느새 내 기억은 40여 년 전 음악다방으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 LP카페
ⓒ 양진형(AI 활용)
'리탐바라 웰니스'와 'LP카페', 이번 여행의 최고였다
이튿날 첫 일정은 콩나물국밥으로 유명한 남부시장에서 간밤의 숙취를 푸는 일이었다. 시원한 국물로 속을 달랜 뒤 연꽃으로 유명한 덕진공원에 도착했다. 예전보다 말끔하게 단장된 공원에는 가을빛이 완연했다. 하늘과 풍경을 데칼코마니처럼 비춰 둘로 가르는 수면이 여행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전주 덕진공원
ⓒ 양진형
이어 한국도로공사가 조성한 전주수목원으로 이동해 덕진공원과는 또 다른 전주의 가을을 만끽했다.
.심은 전날 밤 LP카페에서 소개받은 현지인 중식 맛집에서 먹었다. 탕수육과 짬뽕, 짜장면을 주문했는데, 아내와 딸은 "이렇게 맛있는 탕수육은 처음"이라며 연신 감탄했다.
전주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딸이 물었다.
"아빠는 이번 여행에서 어디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나는 망설임 없이 '리탐바라 웰니스'와 'LP카페'를 꼽았다. 오후 2시 40분, 딸은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우리 부부는 전주 여행에서 얻은 보물 보따리를 한아름 안고 여수로 차를 몰았다.
는 한산했다. 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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