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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10-21 05:18 조회 5 댓글 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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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던 책을 다시 읽으려고 폈는데 도대체 왜 밑줄을 그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았다고 밑줄도 긋고 책 귀퉁이에 소박한 생각을 적어 둔 흔적도 있지만 그때의 마음을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펼쳐 본 김에 예전에 그어 둔 선 위의 문장들을 천천히 읽어 봅니다.
어떤 것은 역시 좋지만, 어떤 것은 왜 표시를 해 두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지식이 설익어서 이런 걸 좋아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땐 마음이 덜 팍팍해서 이 부분에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를 가늠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나 낯설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한 번 읽은 책들이 새 책으로 보이기 때문에 나쁜 기억력도 축복일 수 있다는 말도 떠오르고요.
● 4년 만에 다시 읽는 시집, 낯설어
2022년 10월 고교 수업연구모임에서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1923∼2012)의 ‘끝과 시작’이라는 시집을 함께 읽었습니다. 심보르스카는 괴테상(1991년)과 노벨 문학상(1996년)을 수상한 국민 작가입니다. 두꺼운 시집을 읽고는 마음에 들었던 시를 한 편씩 골라 낭송하고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시는 어려웠고, 읽어야 할 양도 많았지만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시어들 속에서 몇몇 구절들은 꽤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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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전체를 좋아하지 못해도 마음에 남은 구절에 밑줄도 긋고, 느낀 。을 빼곡히 적어 두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집을 4년 만에 다시 읽고 있는데, 여간 낯선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내 소유는 아니다./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내 것이지만,/기억으로 소유할 순 없다.//헤아릴 수도, 저장할 수도 없는 풍경들/미세한 섬유질이나 모래알,/물방울의 개별적인 세밀함은 더한 법.//나는 나뭇잎의 뚜렷한 윤곽 하나/뇌리에 새기지 못한다.//한 번의 눈짓에 담긴/작별을 내포한 환영의 인사//넘치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한/한 번의 고갯짓’(‘방랑의 엘레지’ 중에서)
지금은 담담하게 읽히는 이 부분이 4년 전에는 무척 큰 감동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표시를 해두고 죽음이나 상실을 애도하는 시라는 ‘엘레지’의 뜻을 적어 두고, 우리가 간직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섬세하게 세상을 보지 못하고 뭉뚱그려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기록을 해 뒀더군요. 까마득한 감정의 기억은 기록을 통해서도 떠오르지 않지만, 그 끝 지。에서 시 읽기가 다시 시작됐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시들이 많은 것은 비슷하지만, 과거 기록을 안내 삼아 새롭게 힘을 내며 읽어보고자 합니다.
읽었던 시에서 시작하는 지금, 끝과 시작이 맞물리고 우연과 필연이 섞이는 인생의 면면을 시를 통해 느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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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관적으로 읽으면 바로 이해가 되는 시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들여다보고 음미해야 그 뜻이 드러나는 시도 있습니다. ‘끝과 시작’에 있는 시들은 거의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두툼한 시들 속에서 한두 편이라도 제대로 읽어 가면서 숨겨진 지혜와 의미를 스스로 찾아보는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 4년 뒤 다시 읽으면 또 다른 감동을
4년 전에 이 시집에서 가장 좋았던 시는 ‘두 번은 없다’입니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여름에도 겨울에도/낙제란 없는 법.//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시는 유한한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한 번뿐인 순간들로 이루어진 인생과 훈련도 없이 시작해서 매 순간 새롭게 생성되고 사라지는 삶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 그리고 나는 매일 새로운 존재이며, 매 순간은 처음이라는 시가 적잖이 위로를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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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던 ‘2022년도의 나’와 지금 다시 읽는 ‘2026년도의 나’는 다른 존재일 터, 반복되는 것이 없는 삶이라면 바보 같은 지난 행동을 자책할 필요가 없고 괴로운 일들도 고리를 끊어도 될 것 같습니다. 조금은 가볍게 새롭게 살아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의 감동이 조금 다른 밀도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이 시집에서 가장 유명한 시는 ‘선택의 가능성’입니다. ‘영화를 더 좋아한다./고양이를 더 좋아한다./바르타강 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인류를 사랑하는 나 자신보다/사람들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이렇게 길게 나열되는 ‘더 좋아하는 것’들을 읽다 보면 나는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읽은 것도 잊고 과거도 잊고 매일매일이 새것인 우리가 ‘더 좋아하는 것’들에 집중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숲속에는 샘물도 있고 진귀한 약초도 있지요. 샘물이야 누구나 단박에 알아보지만 약초는 아는 사람 눈에만 보입니다. 시도 자꾸만 읽어 내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의미를 드러내겠지요. 시간이 지나 홀랑 까먹더라도 이 순간 새롭게 이해하고 생각하고 감동받는 독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 가을 심보르스카의 시를 읽어 보시길 권해 봅니다. 그리고 4년 후에 다시 읽어 보세요. 그땐 지금과 다른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조현정 세종과학고 교사
‘더 좋아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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