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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처럼 KTX 고속열차가 내달리는 세상에서야 정말 가당찮은 말이겠으되,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 휴전으로 막을 내린 뒤로 스무 해가 더 흘러간 1970년 초여름까지도 대한민국 국민의 거리에 대한 인식과 정서로는 서울과 포항 사이의 ‘천 리 길’이 대중가수 나훈아의 노랫말 그대로 “머나먼” 곳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고속버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야간열차로는 하룻밤을 꼬박 바쳐야 했고 버스를 이용하면 갈아타느라 더 오래 걸렸다. 정부 수립 후 홀연히 서울에서 사라진 한흑구, 피난 시절의 부산에서 해방공간의 서울에서처럼 문우들의 술자리를 책임졌으나 휴전 뒤에도 서울 문단에 출입하지 않고 포항에 박혀 고요히 살아가는 한흑구를 1970년 무렵에 미당 서정주 시인은 “은둔의 사색가”라고 부른다.
한흑구의 고요함은 고독한 사색의 시간이었다. 날마다 혼자서 영일만 바닷가를 거닐며 갈매기를 비롯해 춘하추동 새로워지는 자연과 교감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인생과 세상도 통찰하는 고독과 사색, 이 무형의 정신과 정서를 그는 오롯이 삶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포항에 정착하여 두세 계절을 보낸 1949년 ‘문예’에 발표한 수필 ‘나의 벽서’, ‘최근에 그린 상념’이란 부제까지 달아 놓은 수필에서 이미 그는 ‘감투’를 멀리 던져버리지 않았던가. ‘나에게는 모자도 쓸데없다. 더구나 감투는 필요치 않다. 여름에는 더위를 막아내지 못하는 감투. 더구나 겨울에는 추위도 막아낼 수 없고, 눈보라에 날아가기 쉬운 감투다. 나에게는 감투가 필요치 않다.’라고 스스로 다짐하듯이 선언했으니···.
감투, 이 세속의 명리(名利)를 멀리하고 은둔자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 차라리 죽어서 ‘독야청청’으로 남겠다고 했던 한흑구는 1955년 4월 그 가혹한 보릿고개에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내고’ ‘쌍쌍이 짝을 짓는 노고지리들에게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게’ 해주는 ‘보리’를 내놓은 그때부터 1960년까지 뒷날 자신의 수필집에 수록하게 되는 대다수 작품을 동아일보에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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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의 ‘보리’, ‘눈’, 1956년의 ‘감’, ‘비가 옵니다’, ‘집’,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1957년의 ‘진달래’, ‘밤을 달리는 기차’, ‘7월의 바다’, ‘성하의 바다’, ‘새봄빛’, 1958년의 ‘여름 아침의 동해’, ‘미국의 현대시-Dylan Thomas를 중심으로’, ‘새벽’, 1959년의 ‘애지자(愛知者)를 등용하자’, ‘외관 위주 건물’, 1960년의 ‘봄비’ 등이다.
<봄이 오고, 비가 내리고, 잠자던 나무에서 새싹이 나온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평범한 사실일지도 모르겠지만, 꽃도 열매도 맺어 보지 못한 나에게는 하나의 무서운 진리가 아닐 수 없다. 하물며 나의 집, 나의 민족, 나라를 생각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지 않은가?>
한흑구는 ‘봄비’가 내리고 새싹이 나온 것을 지켜보며 문득 민족과 나라의 처지와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젊은 시절에 절대적 가치로 숭상하고 추구했던 조국과 민족의 독립이 전쟁의 참화를 불러오고 분단의 고착으로 굳어졌다. 그러니까 ‘꽃도 열매도 맺어 보지 못한’ 것을 쓰라리게 자책한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한흑구는 어느덧 영일만 바다를 어머니의 품과 같이 느끼는 사색가였다. ‘성하(盛夏)의 바다’ 몇 행이다.
<수억 년의 오랜 바다의 역사와 생리를 지니고 있는 듯한 하얀 모래벌판 위에는 여기저기 해당화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조수 위에 한가한 갈매기들은 흰 나래를 길게 펴고, 푸름 위에 흰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고기떼를 노리고 있다.
온갖 생명과 빛을 한 몸에 지니고서 푸르고, 싱싱하고, 부드러운 어머님의 품과 같은 성하의 바다여.>
1957년 3월 어느 날, 한흑구는 포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완행열차에 앉아 차창 너머의 진달래 산천을 바라본 감흥을 살려 그날 밤 여관에 엎드려 쓴 글을 그대로 동아일보에 넘겼다. 이러한 사연은 1970년 봄날에 그가 ‘수필문학’에 편지 형식으로 쓴 수필 ‘차창풍경’에 등장한다.
<안강역에서 올라온 여학생들이 고개를 내밀고 손으로 가리키면서 진달래꽃이 곱다고 떠드는 것을 보았소. 여기도 있다, 저기도 있다. 이렇게 진달래가 곱다고 떠들면서도, 왜 진달래가 고운지 설명하거나, 감상을 말하는 학생은 하나도 없었소. 그래서, 그 길로 서울에 올라가서 ‘진달래’를 수필로 써서 동아일보에 발표하였던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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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진달래’의 몇 행이다.
<어릴 때에 보던 모란봉(牡丹峯) 위의 진달래, 나의 고향의 진달래,
한 송이 따서 입속에 넣던 아기 진달래.
진달래 동산으로 유명한 영변(寧邊) 약산(藥山) 동대(東臺)의 진달래.
바위 틈마다, 바위들을 뒤덮을 듯이 피어나오던 진달래.
분홍 치마들을 깔아 놓은 듯이 동대 위를 덮었던 진달래.
30대의 소월이가 노래하던 약산 동대의 진달래.
20대의 나도 구경 갔던 동대의 진달래. 평안북도라, 5월에야 늦게 피던 진달래였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 나오는 ‘영변에 약산/진달래꽃’을 한흑구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이십대 후반의 5월 어느 날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런데 ‘진달래’에서 새삼 주목할 특징은 ‘나무’와 ‘보리’가 보여준 ‘시적 수필’의 형태미를 갖추려는 의식이 투영됐다는 。이다. 한국문학사에 문학의 장르로서 수필의 독자적 가치와 양식을 개척하고 정립한 ‘수필론’의 선구자 한흑구는 이론과 작품을 겸비한 작가였다.
어머니 병환 소식에 미국 유학을 접고 1934년 4월 평양으로 돌아왔던 한흑구는 석 달쯤 지난 1934년 7월2일부터 5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한세광’의 이름으로 세 차례 나눠 평문 ‘수필문학론-ESSAY연구’를 발표한 적 있었다. 먼저 그는 ‘어의(語義)’부터 설명했다.
<에세이를 동양에서는 대체로 수필이라고 역(譯)한다. 수상문(隨想文)이니 감상문(感想文)이니 즉 감록(感錄), 수상록, 잡감록(雜感錄)이니 하는 모든 산문형식이 다 이 에세이의 부문에 유속(類屬)한 것이다. 종합적 명칭으로 수필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적합한 듯하다. 에세이가 최초로 출현한 것은 불란서의 저술가 몽테뉴의 ‘ESSAI’를 1580년에 출간한 것으로써 비롯한다. ‘ESSAI’ 또는 ‘ESSAY’라는 말은 작자가 생각하는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 요소, ‘말하고자 하는’ 요소 등이다.
에세이는 한 산문형식이다. 그러나 그 문체에 있어서 매우 정적이며 주관적인 것이 서정시에 가깝다. 그리고 내용에 있어서 일정한 형식이 없으므로 어떠한 사물에 대하든지 작자의 관조하는 바를 주관적 입장에서 서술한다.>
‘산문형식이지만 서정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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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에세이(수필)의 특징이라고, 이미 한흑구는 1934년에 밝혀둔 것이었다. ‘결론’에서는 전영택, 이광수, 홍명희, 김동인, 이윤재, 양주동, 최서해 등이 ‘예술적 가치’와 ‘사회개조적 정감’을 갖춘 에세이를 내놓았다고 평가하면서도 에세이에 대해 무관심한 현실을 강하게 비판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출중한 에세이스트가 적고 에세이의 출판량이 적다. 이렇게 조선의 문학은 방향이 없고 이렇게 조선의 사색계는 고갈하였나? 요컨대 조선문학의 사명은 조선의 방향을 선봉 서는 데 있지 않는가? 나는 조선문단에 수필문학의 새 기운을 촉진하고자 한다.>
‘나는 조선문단에 수필문학의 새 기운을 촉진하고자 한다’라는 1934년 7월 한흑구(세광)의 자못 도발적인 선언은 물론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1935년 즈음부터 시 창작에 거의 손을 놓고 산문시대로 들어섰으며 친일문학을 거부하는 절필의 시기를 거쳐 해방 후 드디어 ‘나무’, ‘보리’ 같은 ‘서정시’적이고 시대적 고뇌와 철학적 사색의 기품이 혈액처럼 서린 ‘시적 수필’을 완성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한흑구는 1948년 11월 ‘백민’에도 ‘수필문학론-Essay의 형식 고찰’을 발표한다. 그가 포항에 정착한 무렵이었는데, 이 평문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수필이라고 말하는 것은 영문학에서 말하는 essay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을 거듭 명백히 밝히고 영문학으로서 essay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제공한다.
<영문의 ‘essay’는 불문의 ‘essai’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이 말의 어의는 ‘말하려고 하는 것’ 또는 ‘무엇인가 하고 싶은 것’, ‘시도(試圖)’, ‘기도(企圖)’ 등의 뜻을 갖고 있는 만큼, 즉 시언(試言), 시필(試筆)을 의미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부터 출발한 ‘essay’를 ‘수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적역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수필의 새로운 형식을 우리는 어디까지나 구명해야 할 것이며, 또한 그것의 발전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후학들이 까맣게 모르고 있더라도 한흑구는 에세이 이론의 선구자였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한흑구의 문학적 전모(全貌)를 만나볼 수 있는 방안은 단 하나다. 그의 시, 소설, 평문, 산문, 수필, 번역 등을 장르별로 시계열에 맞춰 가지런히 엮은 ‘한흑구문학전집’을 출간하는 것뿐이다. /이대환 작가
. ‘성하(盛夏)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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