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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을 내주는 집, 가은역
무더위라는 말로는 모자랄 만큼 뜨거웠던 여름이 이제 물러가는가.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기운이 감돈다. 그러고 보니 추석이 머지않았다. 다들 고향을 잃은 채 살아간다지만, 추석을 기다리는 마음에는 여전히 흥겨움이 깃든다.
추석이 가까워오는 길목에서 문경 가은역(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향했다. 지금은 기차가 끊긴 폐역이고 역사에는 카페가 들어서 있다. 그럼에도 가은역을 '집'이라 부르고 싶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어디론가 떠나며 다시 돌아오는 곳이라면, 그곳도 집이 아니겠는가. 가은역은 은성광업소 갱도를 드나든 수많은 광부와 바깥을 이은 통로이자, 고된 노동을 감당한 이들의 또 다른 집이다.
가은역에 이르는 길에는 산과 물이 굽이친다. 물러서고 다가서는 산들과 그 곁을 흐르는 물결에 눈을 두는 사이 어느새 가은역에 닿는다. 가은역은 한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아담하다. 산자락 사이에 소박하게 자리를 튼 모습이 고향의 시골집처럼 정겹다. 단층 건물인 가은역은 몸채를 옆으로 길게 늘이고, 오른쪽으로 돌출된 출입구 위로는 뾰족한 박공지붕을 올렸다.
청록색 지붕 아래에는 '문경 가은역'이라 적힌 역명판이 걸려 있고, 흰 벽을 따라 격자무늬 유리창이 가지런히 이어진다. 역사 너머로는 오래된 나무들이 저마다 키를 세우고 있고 그 나무 위로는 가을 하늘이 펼쳐져 있다. 옛 정취의 역사와 그 뒤를 감싼 나무들과 깊은 하늘이 마치 수채화 속 풍경 같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대합실에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다. 역무원 근무복과 모자, 가은역 사진과 기념품도 한쪽에 전시되어 있다. 탁자마다 손님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창가에 앉은 이들은 유리창 너머의 철로와 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그네도 창가 쪽에 자리를 얻어 앉아본다. 곧 기차를 타고 인근 마을로 떠날 승객이라도 된 듯 마음이 설렌다. 예전 손님들은 철길을 따라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이곳에 머물렀다면, 지금은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잠시 쉬어가기 위해 역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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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고 돌아오는 이를 품었던 간이역이 이제는 누구에게나 쉼을 내주고 있다.
가은역 둘레는 담장도, 출입을 막는 문도 없어 작은 공원처럼 열려 있다. 벤치들이 역사 주변에 놓여 있고, 한쪽에는 탄차를 미는 황금빛 광부 동상이 서 있다. 기차가 오가지 않는다고 가은역까지 닫힌 것은 아니다. 가은역은 더는 승객을 태우고 내리지 않지만, 누구든 발길을 들이는 열린 집이 되었다.
◆탄광이 세워 일으킨 역, 가은역
예로부터 문경은 영남대로와 조령을 사이에 두고 한양과 영남을 이어준 길의 고장이다. 그러나 길의 고장도 시대의 파고를 피하지 못했다. 1924년 문경 남쪽에 .촌역이 들어서자, 사람과 물자가 。촌으로 몰렸다. 역 하나가 문경의 중심을 바꾼 것이다. 반면 철도에서 멀리 떨어진 가은과 마성은 변두리로 밀려난다.
그러던 가은이 뜻밖에도 운명이 바뀐다. 1934년 가은과 마성 일대에 1억 톤이 넘는 질 좋은 석탄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1938년부터 '검은 노다지'를 캐기 시작한다. 탄전이 가은면과 마성면에 걸쳐 있어, 가은의 '은'과 마성의 '성'을 한 자씩 따서 은성탄광이라 불렸다.
어렵사리 채굴한 석탄을 밖으로 실어 나르려면 철도가 필요했다. 1942년 가은과 .촌 사이에 가솔린 기관차가 다니는 협궤철도가 놓였다. 해방 뒤, 나라를 일으키고 공장과 발전소를 움직이기 위해 더 많은 석탄이 필요했다. 가은의 석탄은 철길을 따라 온 나라로 흘러갔다.
1955년 9월에는 진남역에서 가은역까지 새로운 철길이 들어선다. 훗날 가은선이라 불린 산업철도다. 이 역의 첫 이름은 가은역이 아니라 은성역이다. 마을보다 은성광업소의 이름을 빌려 역 이름을 짓는다. 광산이 길 위에 역을 일으킨 셈이다. 은성역은 1959년에야 가은역으로 이름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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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뒤편으로 돌아가 철로 너머에서 가은역을 바라본다. 낮은 역사 앞으로 여러 줄의 레일이 키를 맞춰 나란히 누워 있다. 오랜 세월 석탄과 사람을 실어 나른 철길은 가은역의 몸에 깊이 밴 주름처럼 보인다. 역사는 카페가 되었지만, 레일 위로 멀리서 힘차게 달려온 기차가 금세라도 들어설 듯하다.
철로에 남은 기억을 딛고 마을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때 그 시절, 추석을 기다리던 광부 가족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마을로 가려면 먼저 역 앞 도로를 건너야 한다. 길 한쪽에는 영강으로 흘러드는 양산천과 가은역, 옛 탄광의 흔적이 이어지고, 맞은편에는 옥녀봉을 등진 마을이 산자락을 따라 길게 펼쳐있다. 한쪽이 석탄을 캐고 실어 나르던 일터였다면, 다른 한쪽은 가은 주민들이 하루를 살아내던 삶터였다.
도로를 건너 마을로 들어서니 오래된 담장마다 빛바랜 벽화가 눈에 잡힌다. 춤추는 사람들과 커다란 꽃잎이 그려진 얼룩진 벽 하나하나에 눈길을 건네며 아자개 장터로 향한다. 한때 이 골목은 장을 보러 나온 가족들의 발걸음으로 얼마나 시끌벅적했을까.
아자개 장터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이름을 내건 시장이다. 초가지붕을 얹은 장터 곁에는 흥겨운 표정의 캐릭터가 내걸려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아득한 후백제의 역사와 은성광업소의 기억이 겹쳐 있는 이곳을 후손들은 새로운 장터로 가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일자리를 찾아 광부와 가족들이 가은에 모여들자, 장터에 활기가 돈다. 가족들은 이곳에서 쌀과 고기를 사고, 아이들에게 입힐 옷과 학용품을 구했다. 그러니 아자개 장터는 관광객을 위해 새로 세운 시장이 아니다. 본래 이 장터는 고단한 몸짓으로 한 집안을 먹여 살린 광부들과 가족들의 애환이 켜켜이 밴 인간극장의 무대다. 지금은 관광지의 모습으로 탈바꿈했지만, 한때는 광부 가족의 끼니와 살림을 책임진 북적이던 장터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석탄의 시대도 기울기 시작했다. 탄광들이 하나둘 불을 끄더니 은성광업소도 1994년 끝내 갱도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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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듬해 가은선을 오가던 기차마저 멈췄고, 2004년에는 철길도 소임을 다한다. 탄광이 세워 일으킨 역은 탄광과 함께 긴 침묵에 든다.
◆가은역 위로 보름달이 떠오르고
가족이 함께 사는 곳만 집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고 떠나며, 고된 노동과 눈물겨운 삶을 나눈 곳도 집이 된다. 가은은 제 몸 깊숙이 묻어둔 석탄을 세상 밖으로 꺼내 나라 곳곳에 불을 밝혔다. 그 힘으로 길과 건물이 들어섰고, 광부들은 집안 살림을 일으켰다. 나라를 살리는 일과 가족의 밥상을 지키는 일이 가은의 땅속에서 비롯된 셈이다.
장터를 둘러본 뒤, 이번에는 탄광이 남긴 자취를 찾아 발길을 돌린다. 석탄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양산천을 가로지른 이중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름처럼 한 몸에 두 개의 길을 지닌 다리다. 위쪽 레일로는 석탄을 실은 광차가 달렸고, 아래쪽 길로는 사람과 자동차가 오갔다.
일부러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이중교 위에 선다. 발 아래로 양산천 물결이 잔잔히 흐르고 산들바람이 온몸을 스친다. 귀를 기울이니 광차의 쇠바퀴가 레일과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다리 건너 옛 은성광업소 터는 문경에코월드로 바뀌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던 탄광에 방문객이 찾아오니 반가운 일이다. 그 안에 자리한 석탄박물관은 탄광의 기억을 되살리지만, 박물관을 나서면 놀이 시설과 말끔하게 꾸며진 경관이 펼쳐진다. 그 경관을 보고 있으면 이곳이 한때 수많은 광부가 땀 흘리던 탄광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이중교에 발을 들이고 가은역으로 돌아온다. 하루 일을 마친 광부들도 이 방향으로 걸어 마을로 갔을 것이다. 탄광이 살아 있던 시절, 추석을 앞둔 역에는 가족에게 돌아오는 이와 먼 곳으로 떠나는 이들이 북적였으리라. 폐광 뒤에도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차에 몸을 싣고 저마다의 집을 오갔을 것이다. 추석이면 둥근 보름달이 가은역 위로 떠올랐을 것이다. 그 달빛을 받으며 가은역은 사람을 기다리고 맞는, 가은의 소중한 집이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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