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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모습과 태도는 처음에 우리에게 아무런 경계심을 갖게 하지 않았다." 하고 그는 회상했다. 그런데 갑자기 고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비가 20피트나 됨직한 꼬리가 펌프질하듯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처음엔 약간 좌우로 흔들리며 천천히 움직이던 꼬리의 펌프질이 .. 빨라지면서 거대한 술통처럼 뭉툭한 대가리 주변에 자욱한 물보라가 피어올랐다. 놈은 에식스호의 좌현을 겨냥하고 돌진해오고 있었다. - <바다 한 가운데서> 중에서
1820년이었다. 238톤짜리 미국 포경선 에식스호가 남태평양 한 가운데서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다. 미국 포경산업의 모항이라고도 불렸던 작은 항구마을 낸터킷에서 출항한 지 15개월째였다. 고래기름을 가득 싣고 돌아와 가족과 항구를 번영케 하고, 나아가 미국 산업을 밝힐 것으로 기대됐던 이 배의 침몰과 그 뒤 이어진 일은 사건을 당대 가장 유명한 해난 사고로 기억되게 한다.
배는 때로 때때로 침몰한다. 다시 말해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에식스호의 침몰은 이례적인 사건으로 기억됐는가. 그건 이 배가 통상의 문제, 이를테면 암초에 걸리거나 폭풍우에 파손되거나 해적의 습격이나 선상 반란으로 침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식스호는 고래에 의해 침몰했다. 포경선, 그러니까 그들이 창과 작살을 꼽고, 죽여서 배에 매단 뒤 기름을 짜내고자 했던 바로 그 사냥감에 받혀 가라앉았다. 고래는 인간을 번영케 할 뿐, 망하게 하지는 않는다던 당대의 인식이 그대로 깨져 나갔다.
미국 문학 사상 최고로 꼽히는 소설
▲ 책 표지
ⓒ 작가정신
허먼 멜빌, 스스로 포경선 선원이 되어 생활하기도 했던 이 거칠고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는 에식스호 사건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제껏 없던 장편소설을 집필하기로 한다. 그가 죽기까지 세상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이 비운의 명작은 20년도 더 지나 몇몇 비평가에게 발굴됐고, 그로부터 다시 1세기가 지난 지금은 전 세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작품이 됐다. 한국에선 <백경>이라고도 출간됐던 소설, <모비딕> 이야기다.
"Call me Ishmael"이란 첫 문장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수많은 논쟁이 있었을 만큼. 내가 읽은 판본은 이를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라고 번역한다. 본명이 아닌 가명, 독자를 향해 자신이 <성경> 속 들나귀 같이 떠도는 이스마일 같은 인물이라고 암시한다는 의도의 번역으로 풀이된다. 아무튼 소설은 이슈메일이 제가 겪은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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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일은 초짜 포경선 선원이다. 먼 바다로 나가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인 고래를 잡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낸터킷으로 떠났다. 낸터킷에서 경험 많은 포경선 작살잡이인 퀴퀘그와 만나 친구가 됐고, 그와 함께 피쿼드호에 오른다. 출항 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선장 에이해브는 이상한 사람이다. 고래를 잡는 게 아니라 '어떤 고래'를 잡는 게 그의 목적이다.
세상엔 모비딕이라 불리는 하얀 수컷 향유고래 한 마리가 있는데, 그 고래에게 습격당해 파멸한 포경선과 선원이 한둘이 아니란 얘기다. 에이해브 또한 그 고래를 만나 한쪽 다리를 무릎 아래로 다 잘렸는데, 그에 대한 복수가 에이해브가 배를 타는 이유가 됐다. 사비를 털어 몰래 추가적인 선원들까지 고용한 에이해브의 복수심에 선원들은 물론, 간부인 항해사들까지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그로부터 피쿼드호의 항해는 모비딕을 잡아 죽이기 위한 여정이 된다. 대체 얼마나 치밀하게 연구를 한 것인지 에이해브는 거의 전 세계를 가로지르는 모비딕의 예상 진로와 피쿼드호의 항로를 절묘하게 겹쳐낸다. 소설은 피쿼드호 선원들이 모비딕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으로, 멜빌은 그사이 마주한 여러 고래를 잡아 기름을 짜내며 조금씩 제 운명을 확인하러 다가드는 에이헤브와 선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완역본으로 8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장대한 작품이다. 피쿼드호의 항해는 저 넓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로질러 바다에서도 가장 큰 짐승인 고래들을 여러 마리 사냥하고서 개중 가장 사납고 영리한 개체인 모비딕에까지 다다르니 책이 아무리 800페이지나 된다 해도 결코 여유롭지만은 않다.
고래기름
포경업은 당대의 산업이라 해도 좋았다. 고래기름은 이제 막 발달하기 시작한 커다란 기계의 윤활유로 쓰였고, 거리의 가로등부터 집 안에서 쓰는 등잔에 이르기까지 어둠을 쫓는 귀한 연료가 됐다. 특히 향유고래 머리 부위에서 짜낸 경뇌유는 특등품으로, 그을음과 냄새가 없어 최고급 양초와 램프연료로 쓰였다. 그 밖에도 화장품이며 비누, 섬유와 가죽 가공 등에 고래의 각 부위에서 얻은 물질이 쓰였으니, 고래야말로 18세기의 석유라 해도 틀리지 않았다.
앞서 서술한 <바다 한 가운데서>를 원작으로 한 영화 <하트 오브 더 씨>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의 마지막 대사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약 2세기 동안 번영한 포경업, 그중에서도 가장 발달한 미국 고래사냥의 끄트머리에서 에식스호의 생존자에게 그를 취재하러 온 젊은 작가 허먼 멜빌이 땅에서 기름이 솟았다는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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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대는 그렇게 종언을 고한다(관련기사 : 관련 기사 : 300년간 고래 쫓던 사내들, 비극의 시작이었다).
땅에서 기름이 나기까지, 바닷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너무나 거대하여 경이롭기까지 한 생물 고래의 죽음이 있었다. 문명은 수많은 고래의 죽음으로 기계를 돌리고 불을 밝혔다. 포획된 고래의 정확한 개체 수 추적이 진행된 게 지난 세기말부터의 일이니, 인류가 실제로 죽인 고래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자유롭게 나다니는 수백만의 거대한 생명체 등짝에 작살을 꽂아 그 시체에서 기름을 짜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폐로 호흡하는 동물이 숨을 참지 못해 수면 위로 떠오를 때 먼저 꽂은 작살 옆에 창을 깊이 찔러 넣었다. 수면 위가 붉은 피로 가득했다는 기록을 지난 시대 포경선에 올랐던 멜빌이 쓴다.
<모비딕>은 복수를 향해 나아가는 선장 에이해브의 이야기다. 그러나 화자인 이슈마엘의 눈에 비친 그 복수는 당혹스럽고 슬프기까지 하다. 말 못 하는 짐승에게 무슨 복수란 말인가. 그 짐승에게 무슨 계획과 의도가 있어서 선장은 몇 년이나 시간을 들여 연구하고 온 선원을 위험 가운데 빠뜨린단 말인가. 그 복수가 진정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모비딕이 물에서 끌려 나와 뱃전에 매달린다면 돈 되는 다른 고래들과 구분되는 사악함이 증명될까.
▲ 하트 오브 더 씨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18세기 고래사냥에서 읽는 오늘의 문명
인권이나 세계의 자유도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모든 인간의 생각이나 마음이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종교적 신념의 원칙이라는 것도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번드레한 말을 몰래 가져다 써먹는 달변가에게 진실한 사상은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 거대한 지구 자체도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독자여, 당신도 '놓친 고래'이자 '잡힌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모비딕> 89장 중에서
고래의 소유와 관련해 놓친 고래와 잡힌 고래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작살은 꽂았으되 마침내 도망친 고래의 소유권을 주장했던 수많은 헛된 시도들로부터 일어난 문제다. 바다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오로지 잡은 자만이 잡힌 고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지혜에 도달한다. 놓친 고래는 놓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 육지의 사람들은 그와는 다른 규칙을 들이대고는 한다. 한 걸음 물러나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소설 속 이야기가 날카롭게 발화하는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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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위와 같은 문장으로부터다.
인간은 제가 조금 닿은 것도 자신에게 귀속되는 양 군다. 인권과 세계의 자유, 모든 인간의 생각과 마음, 종교적 신념의 원칙, 진실한 사상, 그리고 거대한 지구 자체를 모두 인간이 쥔 것처럼 군다. 때때로 어느 지혜롭고 너그러우며 아름답고 경건한 이들이 어떤 사상, 인권, 신념, 자유에 다다랐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체 인류는 그것을 가졌는가. 이 모두가 놓친 고래, 헛되이 소유권을 주장해도 닿을 수 없는 것이지는 않은가.
고래 사체가 가라앉은 뒤 얼마 지나기도 전에 '피쿼드'호의 주돛대에서 '융프라우'호가 다시 보트를 내리고 있다는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시야에 들어온 물보라는 긴수염고래의 물보라뿐이었는데, 녀석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영 실력 때문에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종족이었다. 하지만 긴수염고래의 물보라는 향유고래의 물보라와 비슷해서 풋내기 포경꾼들은 자주 혼동한다. 따라서 데리크와 그의 부하들은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짐승을 용감하게 뒤쫓고 있는 것이다. '융프라우'호는 모든 돛을 펼치고 네 척의 보트를 내려 뒤따라갔고, 그렇게 대담하고 희망에 찬 추격을 계속하며 저 멀리 바람 불어가는 쪽으로 사라져 갔다.
오! 세상에는 긴수염고래도 많고, 데리크 같은 친구도 많다. - <모비딕> 81장 중에서
잡힌 고래는 마땅히 잡은 이에게 귀속된다. 그러나 어떤 고래는 영영 잡을 수 없는 곳에 있다. 포경선과 보트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신출귀몰한 긴수염고래 같은 것 말이다. 어리석은 뱃사람은 향유고래와 긴수염고래가 내뿜는 물보라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헛되게 노를 저어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추적을 한다. 세상에는 놓친 고래를 잡았다고 우겨대는 사람도 많고, 잡을 수 없는 고래를 쫓는 이들도 많다.
경제의 번영, 기술의 발전이 세계를 얼마나 나아지게 할지 확신할 수 있는가. 마침내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오리라고, 저 고래만 잡으면 끝이라고, 그렇게 노를 저어가는 뱃사람들은 제 어리석음으로 마침내 패망에 이를지 모를 일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 또 폭주하듯 불어나는 시장과 자산을 우리는 진실로 단단히 뱃전에 매어두고 있는가. 그것이 모비딕처럼 방향을 돌려 우리를 해하러 다가오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늙고 정신 나간 선장 에이해브가 흰 고래 모비딕을 추격하는 소설이 어느 순간 인류와 문명과 진보에 대한 잠언처럼 다가드는 건 그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나는 향유고래가 제 내장에 용연향을 담고 있듯, <모비딕>이 미처 소화하지 못한 위대함을 저 안에 품고 있다고 여긴다.
양 군다. 인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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