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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당신이 차즈시면/ 그ᄯᅢ에 내 말이 ‘니젓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뭇척 그리다가 니젓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밋기지 안아서 니젓노라’// 오늘도 어제도 안이닛고/ 먼 훗날 그ᄯᅢ에 ‘니젓노라’’
소월의 시 ‘먼 후일(後日)’이다. 시집 ‘진달내ᄭᅩᆺ’(매문사 1925)에 실려있다. 먼 훗날을 예견이라도 하듯이, 신전 입구에 새겨진 신탁처럼 시집 첫 장에 나온다. 먼 훗날 당신이 나를 찾으면 잊었노라! 그냥 잊은 것은 아니고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나를 찾을까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세번을 잊은, 이 대목에 이르면 ‘잊었노라’가 진짜 망각이 아니라는 짐작은 든다. 끝 연, ‘어제도 오늘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에 도달하면 잊음과 아니 잊음이 같은 말이로구나 한다. 그러다가 한번 더 읽어보던 참에 ‘잊었노라’가 ‘아니 잊고’보다 더 깊은 곳의 샘물 같은 것임을 알아차린다. 나 보기가 역겨워 떠나는 길에 진달래꽃을 아름 뿌려주는 소월의 역설, 시는 ‘보고 싶다’ 말하지 않고 ‘니젓노라’라고 한다.
장서가 윤길수, 1994년 겨울 퇴근길이다. 방앗간처럼 그날도 서울 노량진 ‘진호서적’에 들렀다. 평소와 달리 주인이 눈치를 보며 머뭇머뭇하더니 책 두권을 내놓는다. 김억의 ‘안서시집’(1929 한성도서)과 소월의 ‘진달내ᄭᅩᆺ’. 우연히도 둘은 오산학교 사제 간이다.
“멍하니 넋을 놓고 손발이 떨립디다. 얼마나 찾아 헤매던, 평생 만나기 힘든 희귀본이죠. 근데 자세히 보니 ‘꽃’이 아니고, ‘ᄭᅩᆺ’이야. 표지에 꽃 그림도 없고, 알려진 것하고 달라요. 책을 하루 빌려 인사동 송해룡 선생을 찾아갔더니 당신도 평생 ‘진달내꽃’을 두번 취급해봤는데 이 책은 처음이라는 거요. 세상에 나오지 않은 유일본 같다면서 무조건 인수하라는 거라. 책값이 300만원, 지금 3천만원이 넘지요. 이튿날 출근해서 적금 해지하고, 그 길로 달려가 그렇게 만났습니다.”
이 바닥에 아무개가 ‘진달내ᄭᅩᆺ’ 유일본을 구했다는 소문이 슬슬 돌았다. 한 1년 지나 청계천 ‘경안서림’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좋은 일 한번 하라면서 시집 들고 동대문 중국집으로 나오라 한다. 거기 허름한 입성의 초로의 사내, 김정호(1932~2006), 소월의 3남이라 한다. “아버지 유품이라고는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 늘 허전했는데, 윤 선생 시집 소문을 듣고 한번 보고 싶어서 염치 불고하고 나왔다”고 한다.
평북 정주, 3남이 세살에 흰 달(素月)은 졌다. 한국전쟁 때 열아홉, 인민군으로 참전했다. 산중에서 생포되어 경남 거제 수용소에 있다가 반공포로로 풀려났다. 남에 눌러앉아 결혼하고 셋방 살면서 열차 가판 끄는 홍익회 일을 4년, ‘가요 60년사’ 레코드 외판 일을 여러해 했다.
“두 손으로 ‘진달내ᄭᅩᆺ’을 조심조심 만져보고 책장을 넘겨 보고 그런 모습이 눈에 선해요. 57쪽에 ‘부모’라는 시가 나와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ᄯᅢ/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안자/ 엣니야기 드러라….’ 노래로 유명하잖아요. 제일 좋아하는 시라고 한참 들여다보십디다. 집 방향이 같아서 전철을 탔는데 살아온 얘기를 잠깐 해요. 배운 것은 없고 살길이 막막해서 시인 서정주를 찾아가 국회 수위로 한참 일했다는 얘기, 그 덕에 애들 출가시키고, 딱 한번 출판사 ‘정음사’에서 찾아와 인세 대신 사례금을 놓고 갔다 하고, ‘엄마야 누나야’ 작곡가가 한번 찾아왔더라 해요. 아무리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이긴 해도 소월 시집이 얼마나 팔렸습니까, 뒷맛이 씁쓸하지요. 얼굴형이랑 눈매가 아버지 사진하고 많이 닮았습디다.”
내년 4월, 서울 은평구 진관동 옛 기자촌 부지에 ‘국립한국문학관’이 개관한다. 이 문학관이 개관을 준비하면서 우리 근대 문학 자료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2024년 조사를 벌였다. 근대의 기。은 동학과 갑오개혁의 해, 1894년이다. 이듬해, 캐나다 선교사 게일 부부가 ‘크리스천’을 한글 ‘긔독도’로 옮긴 ‘천로역정’(배재학당 삼문사)을 번역했고, 최초의 국한문 혼용 유길준의 ‘서유견문’(도쿄 교순사)이 발간됐다. 근대문학은 거기서 해방까지 반세기다.
윤종석 사무국장에 따르면 당시 국공립 및 대학도서관, 전국의 문학관, 개인 소장자들을 수소문해서 나름 전수조사를 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789권, 아단문고 292권, 국회도서관 138권 등이었고, 개인은 윤길수 399권, 여승구 261권, 이주형 120권 순이었다. 전체 통틀어 윤길수씨가 준우승이다.
2014년 우연히 신림동 ‘도동고서’에 들렀다. 산더미처럼 쌓인 고서들 한쪽 바닥에 노끈도 풀지 않은 책 다발이 있다. 맨 밑 권에 눈길이 가서 뽑아보니 뒷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안성공립보통학교 학예부’가 1928년 12월 발간한 학생 문집 제9호 ‘어대전(御大典) 기념호’. 히로히토 일왕 즉위식이 그해 11월 교토에서 열렸으니, 한달 만에 급조한 ‘어용’(御用) 문집이다. ‘아, 안성초교 하면 오장환과 박두진의 모교 아닌가, 그들의 글이 실렸을까?’ 이것이 알고 들어가는 고수의 촉이다. 영락없이 박두진의 글이 나온다. 일왕 즉위 찬문, 일본어로 썼다. 그리고 맨 뒷장에 오장환의 ‘밤’이 실려있다. 그 뒤 3분의 1은 낙장이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전율이 올 때가 있습니다. 둘이 5학년 친구인데 박두진 몇장 뒤에 오장환이 떨어져 나가지 않고 달랑달랑 달려 있는 거라. 가슴을 쓸어내리고 보니, 찬양 글이 아니고 한글로 쓴 동시요”
‘깔큼이 밋헤 빤드리/ 반드리 밋헤 털털이/ 털털이 밋헤 달콤이/ 다람쥐 먹지 말나고/ 깔큼이를 씨웠다네… 시어미 몰내 군밤을/ 이불 속에서 먹으며/ 남보기 먹고 싶게도/ 흥 달다 흥흥 달고나/ 군밤은 메누리 차지’
“열살에 쓴 동시 대단하죠? 당시 시단의 왕 정지용이 새 왕이 나타났다고 했던 오장환입니다. 일제 말 절친이었던 서정주와 결별도 친일 시 때문이에요. 오장환은 평생 단 한편의 친일 시를 안 썼어요. 김영랑 김광섭 변영로 이육사 신석정 등 몇 안 됩니다. 열살이면 생각 없이 쓸 법한데, 어린 오장환을 만나 두번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물유각주(物有各主)라, 세상 만물에는 저마다 임자가 따로 있는 법, 그는 책을 들고 충북 보은의 ‘오장환 문학관’을 찾아간다. 직원들이 깜짝 놀라 회의를 소집하고, 언론사에서 취재를 나오고, 보은군에서도 ‘쾌거’라며 난리가 났다. 당시 오장환 첫 작품은 1933년 휘문고보 교지에 실린 ‘아침’ ‘화염’(火焰)으로 알려졌는데, 5년 앞당겨 ‘밤’이 발견됨으로써 연보를 수정하기에 이른다. 그는 ‘오장환 문학제’에 초대되어 군수 옆자리에 앉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영인본을 제작하여 10권을 넘겨받고 원본은 문학관에 기증했다.
2011년 문화재청은 ‘진달내ᄭᅩᆺ’(중앙서림) 1권과 ‘진달내꽃’(한성도서) 3권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이 시집은 2023년 케이옥션 경매에서 1억6500만원에 낙찰됐다. 이인직의 ‘혈의 누’(광학서포 1908), 한용운 ‘님의 침묵’(회동서관 1926), 이광수 ‘무정’(신문관 1918), ‘정지용 시집’(시문학사 1935), 김기림 ‘기상도’(창문사 1936), 백석 ‘사슴’(선광 1936), 서정주 ‘화사집’(남만서고 1941) 등이 시장에서 1억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그때 전철에서 먼저 내리려는데 김정호 선생이 그럽디다. 혹시 영인본을 만들 계획이 없냐고요. 그냥 별생각 없이 넘어가고 말았는데 그 양반 돌아가셨다는 신문을 보고는 한권 갖고 싶어서 그랬구나, 복사라도 해 드릴 걸 하고 늦은 후회가 들더라”고 했다.
흰 달이 지고 ‘먼 후일’ 책을 찾아 헤매던 한 사람과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한 사람이 한권의 시집에서 만나는 장면, 애절하고, 꼭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만져질 듯 다가온다. 세상일이 애타게 찾다 보면 만나는 경우가 있고, 무척 그리워하다 보면 닿는 수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든다.
고서는 옛 향기를 품고 있어서 코에 닿을 때 강렬하다. 투박하고 고졸한 문자들, 빛바랜 한지의 부드러운 촉감, 보는 색(色)과 닿는 촉(觸)이 먼저이지만,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갈피 바람에 은근히 실려 나오는 향(香)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월의 빗장은 풀리는 것이니, 3남은 그때 진달래 흐드러진 아버지의 산천을 꿈결처럼 한번 다녀가지 않았을까, 싶다.
장서가 윤길수 씨는 유길준 ‘서유견문’에서 공지영 소설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문학 인문 도서, 대부분 초판본을 2만여권 소장하고 있다. 적금이고 청약이고 다 책으로 들어가, 평생 전세 살다가 회갑 다 되어서야 집을 장만했다고 한다.
이광이 | ‘정말로 바다로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다로 가는 노력을 그쳐본 적이 없다’ 목포 김현문학관에 걸린 이 글귀를 좋아한다. 시와 소설을 동경했으나, 대개는 길을 잃고 말아 그 언저리에서 산문과 잡글을 쓴다. 삶이 막막할 때 고전을 읽는다. 읽다가 막히면 ‘쓴 사람도 있는데 읽지도 못하냐?’면서 계속 읽는다.
손오공릴게임
해학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 쓴 책으로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스님과 철학자’(정리), ‘절절시시’, 산문집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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