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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사의 대오로 앞서 걸었다. 누구도 그들의 걸음을 멈춰 세우지 못했다. 대한독립 만세! 구호가 터져나왔다. 탕탕 타다당... 무차별 사격에도 태극기를 매단 깃대는 쓰러지지 않았다. 적의 총구 앞으로 당당히 태극기를 휘날렸다. 치켜세운 태극기가 쓰러지면 다음 사람이 깃대를 받아들었다. 박문호, 채창헌, 최익선, 정기선... 모두 북간도의 교사들이었다. <기자말>
1919년 3월 13일. 독립을 요구하는 북간도 조선 동포 3만 명이 간도 일본총영사관을 향해 행진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대열의 선두에 결사대 대원들이 네 줄로 섰다. 결, 사의 대오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시위대를 지키겠다고 나선 결사대 대원들은 창동중학 교장 마진이 조직한 북간도의 교사들이었다.
그 결사대보다 더 앞에 선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박문호, 그 역시 교사였다. 와룡동과 이도구, 평강을 오가며 아이들을 가르쳐온 누구보다 피가 뜨거운 교사였다. 그는 큰 태극기를 들고 결사대보다 다섯 걸음 앞서 걸어 나갔다. 무장군인들이 멈춰서라고 했지만, 박문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태극기를 매단 깃대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고 앞으로 나아갔다.
결사대의 선두에 선 북간도의 교사 채창헌, 최익선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밤 박문호와 함께 시위계획을 세웠던 최봉설과 임국정을 비롯한 명동학교, 창동학교의 졸업생들도 미리 연습한 노래를 부르며 뒤따랐다. 노래가 끊기면 구호가 터져나왔다.
"대한독립 만세!"
용정 시가지 큰 거리에 들어서자 군인들이 창총을 겨누었다. 군인들과 태극기를 든 박문호 사이의 거리가 40보 정도로 좁혀들었을 때 총성이 울렸다.
탕.
태극기를 매단 깃대를 움켜쥐고 전진하던 박문호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뒤따르던 결사대원 채창헌이 제자들을 뿌리치고 달려나가 쓰러진 깃대를 받아들었다. 오두구 보통학교 교사 채창헌은 태극기를 치켜들고 앞으로 전진했다. 다시 총성이 울리고 채창헌이 쓰러졌다. 이번에는 교사 최익선이 뛰어나갔다. 태극기를 받아들고, 다시 치켜세웠다.
탕탕 타다당...
무차별 사격이 시작되었다. 간도 3.13만세투쟁의 현장에서 가장 선두에서 먼저 쓰러진 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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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호, 채창헌, 최익선은 모두 결사대로 나섰던 북간도의 교사들이었다. 용정영사관으로 가는 길목에서 뒤에 선 제자들의 맨 앞에서 적의 총탄을 몸으로 받아낸 결사대원들은 모두 교사들이었었다.
이들의 최후는 교육이 무엇인지, 교사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용기를 가르치지 않았다. 다만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 제자들보다 먼저 총구 앞으로 걸어갔다.
살아남은 교사의 슬픈 최후
▲ 창동중학 사은기념비 앞에 모인 범도루트 대원들 3.13시위에 앞장선 창동중학 교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사은기념비
ⓒ 방현석
창동중학의 200여 제자들이 이 사은기념비에 이름을 새겨넣지 못한 사람이 교장 마진만은 아니다.
교사 정기선. 그는 3.13시위를 함께 준비하고 참여했지만, 살아남은 교사였다.
1919년 1월 25일, 연길 국자가 소영진에서 독립투사들이 비밀리에 모였다.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벌이기 위한 지역별 책임자를 정했다. 정기선은 정기영, 최봉설과 함께 와룡동 책임위원을 맡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을 자기 삶으로 실천했다. 그는 교사였지만 교실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마을 주민들을 조직하고, 3.13만세운동에 앞장섰다. 그 만세운동의 현장에서 동료이자 동지였던 교사들을 잃었다. 제자들을 잃고, 주민들도 잃었다. 1019년 3월 17일, 시위현장에서 죽은 13명을 용정 남쪽의 공동묘지 묻었다. 총상을 입은 부상자들도 잇따라 죽어갔다. 뼈아픈 상실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는 깊었다. 모두 열아홉 명의 동지들을 만주 땅에 묻으며 더는 만세운동만으로 안 된다는데, 이견이 없었다. 무장투쟁을 결심한 동료들이 대한국민회 군대로, 북로군정서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부대로 떠났다. 그의 동지였던 최봉설과 임국정은 무장투쟁에 필요한 군자금 쟁취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1920년이 왔다. 새해 벽두에 그의 동지들이 일본 현금수송 마차를 털었다. 6월에는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 대한국민회 군대가 연합해 봉오동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10월에는 청산리와 어랑촌에서 홍범도와 김좌진이 연합해 헐전 끝에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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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잇따른 낭보에 정기선은 가슴이 뛰었다. 자신도 무장투쟁전선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참았다. 누군가는 학교에 남아 아이들을 가르쳐야 했다. 더 열심히 가르쳐야 했다.
독립군에게 참패한 일본군은 북간도의 조선 동포들을 상대로 잔혹한 보복에 나섰다. 일본이 '비적 토벌'이라고 부르고, 우리역사가 '경신참변'이라고 부르는 일본군의 대학살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학살작전의 대전제는 '백살일비'였고, 전술방침은 '삼광작전'이었다.
'백살일비'는 백명을 죽이면 그중에 비적 한 명은 있다는 것. 그들이 말하는 '비적'은 물론 우리 독립군이다. 아무나 1백 명을 죽이면 그중에 있을 독립군 한 명은 잡는다는 것이다. 삼광작전은 모두 빼앗고,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워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누구의 것을 빼앗고, 누구를 죽이고, 무엇을 불태웠는가.
무고한 조선 동포들의 것을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 여성들을 유린하고 아이들까지 죽였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연길을 비롯한 길림성 일대 8개 현에서만 조선인 3664명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19개의 교회가 불태워졌다. 3200채의 집이 불탔다. 학교 59개도 불태우고 부쉈다.
1920년 말, 그렇게 불태우고 부순 학교 41개 중의 하나가 정기선이 교사로 근무한 창동중학이었다.
창동중학 교실은 부서지고, 교사들은 잡혀갔다. 교사 정기선도 일본군에게 끌려갔다. 그의 죽음은 차마 입으로 옮기기 어려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일본군은 정기선을 산 채로 얼굴 가죽을 벗기는 고문을 했다. 두 눈을 파내서 죽였다. 그의 시신을 인수할 때 아무도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일본군은 왜 그렇게 학교 선생을 잔인하게 죽였을까.
정기선은 총을 든 독립군도 아니었다. 무장부대를 지휘하는 장군도 아니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남은 사람이었다. 일본 침략자들은 알았던 것이다. 독립군 한 사람을 죽이면 한 사람의 적이 사라진다. 그러나 선생 한 사람을 죽이면 미래의 독립군 수십 명, 수백 명이 사라진다. 한 명이 수십, 수백 명의 독립군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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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는 복종을 거부하고 자유를 꿈꾸는 인간을 기르는 사람들이 선생이었다.
정기선은 바로 그런 선생이었다. 정기선과 같은 선생 하나를 없애는 것은 독립군 수십 명, 수백 명을 없애는 일이었다.
위대하도다 스승의 은혜
▲ 창동중학 사은기념비의 풀을 뽑고 덩불을 걷어내는 범도루트 12기 3.13시위에 앞장선 창동중학 교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사은기념비를 청소하는 범도루트 대원들.
ⓒ 방현석
함께 온 범도루트 대원들과 마른 풀과 덤불, 어지럽게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정리했다. 준비해온 수건으로 기념비를 닦으며 기념비에 새겨진 창동중학의 역사를 다시 천천히 살폈다.
창동중학이 다시 불타고 완전히 문을 닫은 것은 1933년이었다. 1920년, 경신학살의 과정에서 창동중학을 부수고 없앤 것은 일본군들이었다. 주민들은 그 자리에 다시 학교를 열었다. 다시 아이들을 모았다. 살아남은 교사들이 다시 돌아와 정기선이 떠난 교단에 섰다. 월급 없는 입살이 교사를 마다하지 않겠다는 새로운 선생님들이 합류했다. 다시 국어를 가르치고, 국사를 가르쳤다. 체육이란 이름의 군사훈련을 했다. 창동중학의 교정에는 다시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다시 문을 닫아야 할 순간이 닥쳐왔다.
1933년 일본군은 이 학교를 그들의 막사로 쓰겠다며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와룡동의 주민들과 창동중학 졸업생들은 학교를 불태워버리기로 했다. 일본군의 막사로 넘겨주느니 차라리 없애버리겠다고 결정한 것이었다. 뼈아프고, 기막힌 일이었다.
생각해보라. 끼니를 줄여가며 모은 돈으로 세운 학교였다. 일본군이 부수고 닫아버린 학교를 기어코 다시 일으켜 세운 그들이었다. 자식들을 공부시킨 학교를 불태우는 주민들의 마음은 어떠했을 것인가. 자신들이 공부한 교실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졸업생들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 것인가.
2년 뒤인 1935년, 자신의 손으로 학교를 불태운 사람들이 그 학교가 있었던 동쪽 언덕에 참으로 쓸쓸하고 쓰라린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하나둘 일본군의 등쌀에 이기지 못한 주민들과 졸업생들이 떠나고 이 기념비는 풀숲과 덤불에 덮인 채 잊혀졌다.
이 기념비를 찾아 와룡동 언덕에 올라올 때마다 처음 발견했던 날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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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혼자의 힘으로는 이 기념비에 엉겨붙은 덤불도 떼어내기도 어려웠다. 나는 처음, 그 덤불에 가려졌던 비문을 읽어나가며 전율했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이 아름다운 사은기념비가 어떤 기억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이렇게 잊혀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은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진 '위대한 스승들'과 오직 자신들을 '교양한' 스승들의 은공만을 칭송한 '200여 제자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13년 동안 지치지 않고 만주와 연해주에서 바람으로 흩어진 항일무장투쟁 전사들의 이야기를 쓰는 데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200여 제자들'의 마음이 내 안에서 떠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덤불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이들의 눈물겹게 아름다웠던 시간을 생각하면 나는 자다가도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 기념비에조차 이름을 남기지 못한 마진과 박문호, 정기선과 같은 이들을 생각하면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이들은 내가 지치고 흔들릴 때마다 나를 일으키고 가야 할 길을 가르쳐주었다. 이들 덕분에 소설로 쓴 항일무장투쟁사, <범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기념비 앞에 와서 이들의 시간을 기억해줄 사람이 천 명쯤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다행히 <범도>를 읽고 이야기의 현장에 가보고 싶다는 분들이 계셔서 범도루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오늘도 함께 온 든든한 일행들이 있어 마른 풀숲과 어지러운 덤불을 금방 말끔히 걷어냈다. 나는 깨끗하게 닦아낸 기념비 뒷면에 한자로 새겨진 비문을 소리내어 또박또박,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사립 창동중학 원장 오상근 이병휘 남성우,
은사 신홍남 김종만 홍우만 이진호 김이택 송창희 서성권 문경,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심혈을 기울여 우리를 교양하셨다.
위대하도다 스승의 은혜.
아름다워라 창동이여.
이 학원에서 배운 200여 제자들은 잊지못할 스승의 그 은공을 이 비에 새겨 칭송하노라.
- 1935년 9월 12일 창동학교 원우회원 일동 건립"
▲ 창동중학 사은기념비 앞에서 묵념을 올리는 범도루트 5기 3.13시위에 앞장선 창동중학 교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사은기념비를 청소한 뒤 그들의 정신을 기리는 범도루트 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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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현석
이 비문에는 이 학교를 세울 때 누가 돈을 얼마나 많이 냈는지, 학교 운영비를 가장 많이 희사한 사람이 누구인지, 단 한 글자도 없다. 졸업생 가운데 누가 어디까지 출세했는지도 없다. 기념비 건립비용을 낸 사람의 이름도 없다. 위대한 스승의 은공을 칭송하는 익명의 '200여 제자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기억하고 새긴 것은 오직 자기들을 가르친 스승의 이름이었고, 칭송한 것은 위대했던 스승들의 은혜로 아름다웠던 창동학교였다.
아마 '200여 제자들',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오로지 자신을 가르친 스승의 은혜만을 기억하고 기리는 비문을 통해서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가장 훌륭하게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그들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자들이었다.
그 아름다웠던 제자들이 걸어간 길이 항일무장투쟁의 길이었다.
창동중학 사은기념비가 보여주는 것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오늘의 성공한 대한민국을 만든 힘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이 기념비다. 창동중학 졸업생들은 자신이 가르친 것을 적의 총구 앞으로 먼저 걸어가며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스승들의 이름을 이 기념비에 새기지 못했다. 그럼으로써, 이 사은기념비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분투한 교사들이 어떤 가혹한 댓가를 치르고, 어떤 기억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사라져갔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창동중학의 '200여 제자들'이 이 비에 새기지 못한 스승들, 마진과 정기선, 박문호의 이름은 만주의 바람으로 흩어진 채 얼마나 오래 잊혀져 왔는가.
나는 와룡동 언덕을 내려오며 주민들이 살았던 마을에서 학생들이 등교하고, 교사 정기선이 수업을 마치고 돌아갔을 길을 굽어보았다.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곳이 폐허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에 학교가 있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 나라를 되찾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이 여기에 남아 있다.
100년 전 그들이 걸어가는 길 위로 불었던 바람이 오늘도 와룡동의 언덕을 내려오는 우리의 등을 떠밀고 있다.
정기선, 박문호. 그들이 이 길을 오가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아이들이 대한민국의 길을 열었다. 학교는 사라졌지만, 그들이 연 길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길을 따라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더욱 단단히 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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