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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읍내에서 멀지 않은 산자락 마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화순군 화순읍 주도리. 마을 뒤편 '생활권 등산로' 들머리에 들어서면 허브 향이 먼저 마중을 나온다. 백암마을 숲까지 3.36㎞를 잇는 산길의 출발。에 치유·체험 민간정원 '허브뜨락'이 자리 잡고 있다. 입구 안내판에는 원예치유실·허브원·약초원·라벤더원부터 춘호지·남영원·88산책로·에피쿠르스길까지 24곳의 이름이 빼곡하다. 그런데 막상 정원에 들어서면 반듯하게 다듬은 화단 대신 풀꽃과 허브가 어우러져 자란다. 처음 온 이들은 "풀밭 같다"고 하지만, 그 '풀밭'이 바로 이 정원의 철학이다.
허브뜨락은 전라남도 민간정원 제9호다. 약 1만6,000㎡(4,860평) 부지에 정원과 살림집, 카페, 원예치유실, 힐링숙소가 들어서 있고, 농촌진흥청 '우수 치유농업시설'로도 이름을 올렸다. 정원주는 조선대에서 36년간 교편을 잡은 특수교육학자 김남순 대표와 초등학교 교사 출신의 부인 양영자 대표다. 화려함 대신 사람의 마음을 여는 정원, '치유'의 시선으로 허브뜨락을 걸었다.
◇아내가 내민 '계약서 한 장'…가시덤불을 굴삭기로 열다
전북 익산 시골에서 나고 자란 김 대표는 시골살이가 얼마나 고된지 잘 알았다. 다시 시골로 들어가는 일이 탐탁지 않았던 이유다. 반면 도시에서 자란 부인은 꽃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강원도 춘천의 처가는 한옥 개량집 주변이 온통 화분이었고, 장인·장모는 한겨울에도 볕 좋은 날이면 화분을 밖에 내놓을 만큼 꽃을 아꼈다. 김 대표는 "생물학적 DNA도 있겠지만 성장 배경의 '환경적 DNA'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고 웃었다.
광주 봉선동 아파트에 살던 어느 날, 퇴근한 그에게 부인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땅 계약서였다. 아파트 옥상에서 키우던 허브가 자꾸 죽어 나가자 하우스 한 동 지을 땅이라도 마련하겠다며 덜컥 계약을 한 것이다. 27년 전 700평 남짓으로 시작한 땅은 집을 짓고 정원을 넓히며 지금의 4천860평이 됐다.
처음엔 길조차 없었다. 입구에서 지금의 집 자리까지 가시덤불이 뒤덮여 걸어 들어가기도 힘들었다. 김 대표는 굴삭기를 한 대 사서 주말마다 직접 길을 냈다. 부부는 퇴근하면 이곳으로 달려와 밤 10시까지 불을 밝히고 일했다. 정원의 나무와 꽃은 모두 하나하나 손으로 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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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은 "지금 생각하면 멧돼지라도 나왔으면 어쩔 뻔했나 싶은데, 그때는 그냥 좋았다. 지금도 좋다"고 했다. 이곳에 집을 짓고 산 지도 24년째다.
◇장애아 엄마들을 위한 교실…"친구를 만들어 주는 정원"
허브뜨락은 처음부터 '사는 집'만은 아니었다. 1986년 미국 미시간대에서 연구하고 돌아와 대학 평가단으로 전국을 다니던 김 대표는 지역의 장애인 배려가 얼마나 부족한지 절감했다. 그는 2년 동안 교육부를 설득해 1998년 조선대 특수교육과 신설을 이끌었다. 근거를 만들려고 토요일 오후 광주 충장로 입구에 3시간 동안 서서 장애인 통행 인원을 직접 세기도 했다. 같은 시간 대구 대명로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그는 "장애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따가운 시선 때문에 밖에 나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집을 지으면서 위층에 일부러 교실 한 칸을 들였다. 장애 자녀를 둔 화순의 어머니들과 상담하고, 함께 걸으며 이야기하도록 산책길도 냈다. 4월이면 아이들과 황토밭에 고구마를 심고 풀을 뽑았고, 가을에 수확한 고구마로 아이마다 가장 좋아하는 친구 두 명씩을 초청해 파티를 열었다. 김 대표는 "장애 아이가 고립되는 가장 큰 이유는 친구가 없어서"라며 "어릴 때부터 엄마가 친구를 만들어 줄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2015~2016년까지 이어진 이 프로그램은 이후 성인 장애인 직업교육으로 옮겨 갔다. 화순의 성인 장애인 10명 이내를 뽑아 적성검사를 하고, 가장 강.을 보인 영역을 중심으로 1년간 개별화 직업교육을 했다. 그에게 박사학위를 받은 제자들이 자원봉사로 힘을 보탰다. 취업에 성공한 이들의 '생애 임금'을 따져 보니 1인당 약 1억5천만원의 사회적 이익이 났다. "지원을 받던 사람이 세금을 내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요즘은 어르신들의 발길이 잦다. 얼마 전에는 인근 요양원에서 아흔이 넘은 어르신들이 찾아와 허브 향을 맡으며 차를 마시고 허브소금을 만들었다. 김 대표는 "94세 할머니가 고향 집 모양이며 두 딸이 하는 일까지 또렷하게 이야기하시더라"며 "어르신들과 함께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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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브오일·허브소금·허브식초 만들기, 반려식물 번식, 산림청 바우처 프로그램, '팔팔하고 가슴 설레는 나의 인생설계'를 줄인 1박2일 '팔가나인'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교원 마음치유 연수 같은 단체 프로그램도 꾸준하다.
◇에피쿠로스의 '정원학교'에서 길을 찾다
정원 안내판의 '에피쿠르스길'에는 정원주의 철학이 담겨 있다. 김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는 에피쿠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다. 에피쿠로스는 30대에 재산을 정리해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 길 건너에 400평 남짓한 땅을 사서 '정원학교'를 열었다. 그가 말한 쾌락은 마음이 가장 평온할 때 느끼는 행복이었고, 그런 행복에 가장 알맞은 곳이 정원이었다. 김 대표는 "정원에 들어서면 사람의 마음 문이 열리고, 열린 마음에서 비로소 소통이 된다"며 "그 시절 정원학교에는 노예와 여성까지 함께 공부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몇 해 전 그리스 아테네를 찾아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 에피쿠로스의 정원학교,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 터를 이어 걸었다. 세 곳은 반경 3㎞ 남짓한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기원전 340년 무렵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길을 걸었을까 생각하며 다짐을 새로 했지요. 지금도 나무 한 그루 심을 때면 가슴에 품은 에피쿠로스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묻습니다. 당신이라면 여기에 무슨 나무를 심겠느냐고."
◇"꽃이 지는 것도 정원"…초화류 자연주의 정원의 고민
허브뜨락은 나무가 아닌 초화류 중심의 자연주의 정원이다. 꽃은 피고 지기를 되풀이한다. 꽃이 질 무렵 찾은 이들은 "관리를 안 하느냐"고 묻는다. 부인은 "다음 꽃이 올라오고 있고, 진 꽃은 씨앗을 맺어야 이듬해 다시 뿌릴 수 있다"며 "정원은 씨 뿌리고 꽃 피워 꼬투리를 맺기까지 인생처럼 흘러가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치유되는 곳인데, 다들 세팅된 예쁜 모습만 정원이라고 생각한다"고 아쉬워했다. 부부가 둘러본 유럽과 코카서스의 정원들도 일부만 손대고 대부분 자연스럽게 두고 있었다고 한다.
고민은 풀을 뽑을 때마다 깊어진다. 해마다 사라지는 풀의 종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부인은 "돌 틈의 제비꽃 하나도 뽑다가 옮겨 심게 된다"고 했다. 지자체가 앞다퉈 심는 핑크뮬리와 금계국 같은 외래종이 토종 야생화를 밀어내는 현실, 농약도 화학비료도 쓰지 않는 이곳에서조차 해마다 눈에 띄게 줄어드는 벌도 걱정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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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대표는 분재도 하지 않는다. "꼬고 트는 건 사람의 인위"라는 이유에서다. 손을 덜 대니 방치했다는 말도 듣는다. 부인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정원이 생계 도구로 전락해선 안 돼"
허브뜨락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김 대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정원이 생계의 도구로 전락하는 일이다. 그는 "가치와 철학이 바탕에 튼튼하지 않으면 정원은 결국 생계 수단의 하나로 떨어지고 만다"며 "대학에서 36년 근무하며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이것마저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했다. 장애가 있는 이들이나 노령의 어르신들이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위로받는다면 그것이 최대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해외 정원을 다니며 얻은 깨달음도 같은 곳을 가리킨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대학 정원을 찾았을 때는 일요일인데도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전문가를 불러 안내해 줬다. 그는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기 전에 정원주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가 정원의 품격을 결정하는 핵심"이라고 말했다. 국립정원문화원의 교육도 좋지만 민간정원 현장에서 정원주의 마음가짐까지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제언도 덧붙였다.
젊어서 기초 작업을 해 둔 덕에 지금은 큰돈이 들지 않는다. "지금은 즐기면 되잖아요." 정원의 내일을 묻자 부인은 담담했다. "자손이 이어 주면 좋지만 억지로 데려올 수는 없지요. 하는 데까지 하다가 나눠 주고, 못 하면 기부하고 가면 끝나는 거예요. 힘들어도 우리 둘은 즐거워요."
◇보는 정원에서 '사는 정원'으로
김 대표의 마지막 꿈은 정원 안의 '삶의 공동체'다. 아래층은 함께 생활하고 위층은 사생활이 보장되는 공동주택을 지어,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이 정원 안에서 배우고 가르치며 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원 한쪽 공간을 비워 두었다. 그는 15년 전쯤 아파트 주민 가운데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이웃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파트 학교'에 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생활이 곧 학교이고 학교가 곧 생활이듯, 생활 자체가 정원이고 정원이 곧 텃밭인 삶을 꿈꿉니다."
한 번 둘러보고 가는 정원에서 마음을 열고 머무는 정원으로. 2천300여 년 전 에피쿠로스가 아테네 교외에 열었던 정원학교가 화순 산자락에서 다시 문을 열고 있다.
꽃은 피고 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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