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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문중 묘소 진입로까지도 아스팔트 포장 도로가 깔리는 시골이다. 어느 시골도 산길을 오르내리는 불편함이 없다. 초가을 찾은 전남광주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검은산(189m) 자락 야산도 그러했다.
영광읍 내에서 남동쪽으로 직선거리 3km에 불과한 신천리의 완만한 구릉지대에 띄엄띄엄 집들이 있었다. 그 집들 아래 전남광주에서 최대 규모의 담수를 자랑하는 불갑저수지가 펼쳐져 있다. '불갑사 상사화'가 피는 가을이면 불갑저수지 수변공원이 축제의 장으로 변하곤 한다.
지난달 17일 한 여행자가 '영광 신천리 삼층석탑'을 찾았다. 하루 1명도 찾지 않는 야산 자락 석탑이다. 반듯한 주차장도 완비되어 있다. 2023년 여름 폭우로 석탑 석축이 붕괴됐으나 바로 복원됐다.
충남 당진에서 차를 몰고 왔다는 이석범(가명·63)씨는 "정년퇴직 후 버킷리스트를 실천해 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 유홍준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으며 강진 다산초당 등 남도 여행을 하고 싶었다"며 "하지만 사는 게 바빠서 미뤄졌다가 비로소 결행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전형적 베이비붐 세대였다.
22일 영광군에 따르면 행정안전부의 인구감소지역 재지정 결과, 영광군이 '인구활력+지역'에 포함됐다. 기존 인구감소지역 중 이번에 인구활력+지역으로 분류된 곳은 영광군과 부산 동구, 대구 서구 등 전국 3곳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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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군 단위 중 유일하게 인구가 늘었다. 2021년 말 5만2067명, 올해 9월 5만3,608명으로 1541명 늘었다. 증가율은 3.0%다. 의미 없는 숫자 같지만 '지역소멸위기'에서 벗어난 경사스러운 지표가 됐다.
영광은 조선시대 '남영북악(南靈北岳)'이라 하여 남쪽에는 영광, 북쪽은 연악군의 별칭을 얻었다. 살기 좋고 풍요로운 고장이었다는 뜻이다. 실제 영광은 남도 28개 고을의 조세를 관할했고 중종 시기 법성진을 설치, 수군만호가 다스리게 할 만큼 위세가 있었다.
조선(漕船)만 38척, 조군이 1344명이었다. 중종실록은 "풍요로운 들판과 칠산바다 물고기와 소금을 가진 고장"이라 적었고, 흥선대원군은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 즉 가구 수와 인구가 많은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평했다.
신천리 삼층석탑은 그 동쪽으로 함평 나주 광산 광주를 잇는 조선의 중로(中路) 옆에 자리했다. 국가 재정의 근간이 되는 내륙의 조세 물자가 이 길을 따라 조운창 법성포에 닿았다. 그러니 간선로 중간중간 역원(驛院)의 체계를 갖추며 번창했다.
조선 전기 관찰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영광군 불우(佛宇) 조에 이흥사(利興寺)가 기록되어 있다. 신천리 삼층석탑은 이흥사의 석탑으로 이 사찰은 고려 초기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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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높이는 3.5m로 아담하고 소박하다.
조선시대 중·대로 옆의 사찰은 공적 기능을 대신했다. 단순한 종교 도량을 넘어 관아를 오가는 관리, 보부상과 나그네 등이 이동할 때 머무는 거。 역할을 했다. 또 승려는 인근 길을 보수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보시했다.
사찰 앞길로 쌀, 소금, 굴비 등 물화가 오갔으니 늘 분주했고, 약탈과 사고 등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졌다. 도량은 그때마다 안식과 피난처가 됐다. 그 신천리 삼층석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것을 넘어 극락을 꿈꾸는 백성의 염원을 담았다.
하지만 이 전통의 삶은 일제가 조선 경제를 쥐고 흔들기 시작하며 균열을 보였다. 신작로라는 이름으로 길을 넓히면서 수탈을 위한 도로로 바뀌었다. 게다가 영광 법성포~광주를 잇는 길목에 호남선 송정리역이 생기면서 더 광범위한 물자가 법성포 포구를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조선 중로는 미곡과 수산물 수탈 길이 되고 말았다.
조선 후기 이흥사는 시나브로 사라졌다. 고려와 조선 초기 때보다 조운창을 통한 물화 이동이 약해지면서다. 여기에 직선화된 신작로와 운송수단의 변화는 옛 운송 체계를 뒤흔들었다. 그에 따라 읍성 중심으로 한 읍치 안의 생활 방식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1960~70년대 산업화 시기 포장도로가 건설되면서 조선의 중로는 소로(小路)처럼 돼버렸다. 이제 나그네를 위한 역원 체계는 신천리 삼층석탑에서나마 그 흔적을 찾을 뿐이다.
그 신천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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