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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찰에 울려 퍼진 신명 나는 발걸음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전등사를 둘러싼 삼랑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처음에는 토성이었으나 삼국시대에 석성을 쌓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전등사는 매년 가을이면 삼랑성역사문화축제를 연다. 올해로 26회를 맞은 축제는 10월 3일부터 11일까지 다채로운 행사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10월 10일, 하늘은 높고 가을은 무르익었다. 완연한 가을을 느끼며 전등사를 찾았다. 절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눈길을 끄는 현수막 하나가 펄럭였다. 국가무형유산 제58호 줄타기 공연을 알리는 현수막이었다. '줄타기가 국가무형유산이라고? 서커스 같은 공연인가?' 호기심이 일었다.
▲ 외줄 위에서 기예에 가까운 줄타기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줄광대. 재담과 익살을 섞어 공연을 펼쳤다.
ⓒ 전갑남
전등사 대웅전 앞마당에 들어서니 굵은 줄이 팽팽하게 매어져 있었다.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마당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앉을 자리는 이미 다 차서 하는 수 없이 서서 관람하기로 했다.
마당에 펴진 흥, 줄 위에 실린 안녕
공연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쪽에서는 피리, 젓대, 해금, 장구, 북으로 이뤄진 삼현육각(三鉉六角) 악사들이 정갈하고 기품 있는 가락을 잡았고, 마당 가운데서는 풍물패가 꽹과리와 장구를 치며 흥겨운 판을 열었다. 여느 농악과는 어딘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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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댕기를 매고 긴 상모를 돌리는 솜씨는 물론, 사물을 다루는 몸짓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아 절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 본격적인 줄타기 공연에 앞서 풍물단원들이 활력 넘치는 농악놀이를 펼쳐 흥을 돋웠다.
ⓒ 전갑남
▲ 사자탈을 쓴 연희자와 꽹과리를 치는 풍물패가 마당 한가운데서 신명 나는 한판 놀이를 펼쳤다. 줄타기 공연은 종합예술에 가까웠다.
ⓒ 전갑남
이어 줄고사가 시작됐다. 줄타기 공연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출연자들이 진지하게 고사를 올리는 모습을 보니 관객들도 덩달아 숙연해졌다. 신명 나는 놀이 한판에도 공연자의 안전을 비는 마음이 먼저였다.
드디어 줄광대가 등장했다. 줄 아래에는 어릿광대가 함께했다. 줄광대가 줄 위에서 재주를 펼치고 어릿광대가 땅 위에서 말을 주고받으며 공연을 이끌었다. 줄타기는 줄 위에서 재주만 부리는 놀이가 아니었다. 음악과 몸짓, 재담이 어우러지는 한판의 마당극이었다.
줄 위 한 걸음, 가슴 졸이는 팽팽한 순간
줄광대는 곧장 줄에 오르지 않았다. 먼저 고무신을 벗더니 물병을 들어 양말 바닥을 적셨다. 준비를 마친 줄광대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줄을 붙잡고 한 걸음씩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걱정이 앞섰다. '처음부터 발을 헛디뎌 떨어지면 어쩌나?' 바닥에는 매트리스 하나 깔려 있지 않았다. 줄광대에게는 익숙한 일인지 몰라도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마침내 줄 위에 올라선 줄광대가 두 팔을 벌려 균형을 잡았다.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이제부터 어떤 재주를 보여줄까. 긴장과 기대가 한데 뒤섞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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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손에는 부채, 다른 한 손에는 수건을 쥐고 균형을 잡으며 미소를 잃지 않는 줄광대의 여유. 보는 이는 가슴을 졸였다.
ⓒ 전갑남
줄광대는 조심스레 한 발씩 내디뎠다. 흔들리는 줄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더니 걷는 것을 넘어 팔짝팔짝 뛰는 재주까지 선보였다. 손에 든 부채 하나로 중심을 잡는 모습도 놀라웠다.
저런 기예를 익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련을 했을까. 줄광대의 솜씨에 감탄하면서도 그 뒤에 쌓였을 땀과 노력이 헤아려지지 않았다. 줄이 흔들릴 때마다 관객들의 마음도 함께 흔들렸다. 행여 발을 헛디디지 않을까 가슴을 졸이다가도 기예가 성공하면 안도감과 함께 박수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아슬아슬한 줄 위에서 피어난 웃음과 해학
아슬아슬한 순간마다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마당에는 웃음도 끊이지 않았다. 어릿광대가 줄광대와 주고받는 사설 때문이었다. 익살스러운 말 한 마디에 웃음이 번지고, 능청스러운 대꾸가 이어지면 다시 웃음이 터졌다.
▲ 줄 아래에서 줄광대와 재담을 주고받는 어릿광대는 줄타기의 재미를 배가시켰다.
ⓒ 전갑남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자니 두 광대의 주고받음이 단순히 웃음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만은 아닌 듯했다. 어릿광대의 재담은 줄광대의 기예와 맞물려 공연에 힘을 보탰다. 줄 위에서 온몸으로 균형을 잡으며 재주를 부리는 줄광대와 줄 아래에서 말을 건네는 어릿광대가 서로 호흡을 맞췄다. 한쪽이 관객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면 다른 한쪽은 해학 넘치는 재담으로 긴장을 풀어주었다.
▲ 팽하게 매어진 외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부채를 펼쳐 들고 유쾌한 입담과 재담을 건네는 줄광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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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타기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 전갑남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줄광대는 。. 어려운 기예를 펼치는 것도 모자라 줄 위에서 멋진 소리까지 불렀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구성진 소리가 어우러지니 공연의 흥이 절정에 이르렀다. 줄 위에서 저런 재주를 부리면서 어떻게 노래까지 할 수 있을까.
관객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여기저기서 "잘한다, 잘해!", "얼씨구!" 하는 추임새가 터져 나왔다. 줄 위에서는 숨을 죽이고, 줄 아래에서는 웃음을 터뜨리며, 광대와 관객이 한데 어우러져 한판의 신명을 완성해 가는 순간이었다. 마음으로 전해진 저마다의 길을 응원한다. 공연의 끝자락, 줄광대의 마지막 사설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
"줄 위에도 다 길이 있는 법이오. 그 길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가다 보면 언젠간 끝에 다다르는 법이지. 오늘 찾아주신 분들 걸어가는 길에도 그저 좋은 일만 가득하길 비오!"
외줄에서 아슬아슬한 기예를 펼치던 광대가 한 말이라 그런지 더욱 귀에 쏙 들어왔다. 줄 위에서 한 걸음씩 길을 가듯 우리도 저마다의 길을 걸어간다. 그 길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란다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줄타기는 단순한 재주가 아니었다. 줄광대의 기예와 어릿광대의 해학, 삼현육각의 연주가 하나로 어우러진 종합예술이자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따뜻한 마당극이었다.
▲ 공연을 끝내고 출연자 모두가 관객들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관객들은 큰 박수로 화답했다.
ⓒ 전갑남
대웅전 앞마당을 가득 채운 흥겨움에 빠져 함께 박수를 치다 보니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신명 나는 판이 벌어졌으니, 전등사 대웅전 처마 밑 나부상도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지 않고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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