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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1월 3일은 광주학생독립운동 97주년이다. 1929년 광주에서 시작된 항일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돼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민족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 항쟁을 11월 3일 한일 학생의 우발적 충돌에서 비롯된 사건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미 학생들은 비밀결사와 독서회를 조직하고 일제의 민족차별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광주고등보통학교 출신 이경채(李景采)의 역할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1910년 광주 송정리에서 태어난 이경채는 1924년 광주고보에 입학했다. 1926년 5월 박병하·윤해병 등과 독서회를 조직해 식민지 현실을 비판하는 책을 읽고 토론했다. 1928년 4월, 일본 천황제와 식민통치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선언서와 격문을 등사판으로 인쇄해 광주와 송정리 곳곳에 붙이고 경찰서 등에도 우송했다. 경찰은 관련 청년 운동가들을 검거했고, 6월 8일 이경채를 체포했다.
광주고보 일본인 교장은 기소조차 되지 않은 이경채를 6월 19일 퇴학시켰다. 학생들은 그의 복학과 부당한 징계 철회를 요구했다. 학교가 학생 대표들을 징계하자 6월 26일 1학년을 제외한 2~5학년 학생들이 일제히 동맹휴교에 돌입했다. 학교 당국은 주모자 27명을 퇴학시키고 281명에게 무기정학을 내렸다. 이러한 강경한 탄압에도 학생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경채 한 사람에 대한 퇴학 조치가 광주고보 전체를 뒤흔드는 대맹휴로 번진 것이다.
이경채 사건 이전에도 광주 학생들은 성진회와 학교별 독서회를 통해 동지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학생의 퇴학에 맞서 전 학년이, 전남사범학교, 광주농업학교까지 대거 맹휴에 가담한 대맹휴는 그 결속이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난 사건이었다. 학교가 퇴학과 무기정학으로 학생들을 갈라놓으려 할수록 투쟁은 확대됐다. 학교 안에 남은 학생들과 퇴학당한 학생들 사이의 연결도 끊어지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경험이 1929년 11월 항쟁에서 학생들의 연속적인 궐기를 가능케 했다.
대맹휴의 중요한 성과는 조직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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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0일 최규창의 하숙집에 임주홍 등 학생 대표들이 모여 맹휴중앙본부를 결성했다. 참모부·통신부·외교부·회계부를 두고 지방 학생들과 연락망을 만들었다. 학부형에게 맹휴의 정당성을 알리고 학교장에게 항의문을 보내는 등 투쟁을 조직적으로 이끌었다. 여기서 맹휴는 더 이상 단순한 수업 거부가 아니었다. 학생들은 일제의 탄압을 견디면서 항일시위를 이어갈 방안을 구상해 나갔다.
이경채가 남긴 「투쟁경력」은 그 준비 과정을 구체적으로 증언한다. 제1선 시위 학생들이 체포되면 제2선이 나서고, 제2선이 체포되면 제3선과 제4선이 차례로 항쟁을 계승하도록 계획했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저항을 한 차례 시위로 끝내지 않겠다는 구상이었다. 1928년 이경채 사건에서 시작된 대맹휴와 맹휴중앙본부의 경험이 이듬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토대였음을 보여준다. 이경채는 그해 10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29년 9월 4일 가석방됐다. 시민과 학생들이 그를 항일 영웅으로 받아들였지만 일본 경찰의 감시는 계속됐다.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들의 항일시위가 일어나자 청년운동 지도부는 제2차 시위를 준비했다. 장석천·장재성 등은 학생투쟁 지도체계를 구축하고 식민통치와 민족차별을 비판하는 항일격문을 마련했다. 제1차 시위가 학생들 사이의 충돌에서 시작됐다면, 제2차 시위에서는 일본 총독정치에 맞서는 항쟁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려 했다. 경찰력이 시위 진압에 쏠려 감시가 느슨해지자 이경채도 비밀리에 지도부를 만났다.
이경채는 출옥한 지 두 달 남짓이었다. 체포될 위험을 알면서도 학생 대표들을 만나 시위 방향을 논의했다. 위험을 무릅쓴 행동은 제2차 시위 준비의 긴박함을 말해준다.
11월 10일 밤 광주 금계리 박석기의 집에서 광주고보 오쾌일·이영범, 광주농업학교 김남철·정욱·조길룡, 전남사범학교 이신형·황상남 등이 회합했다. 각 학교 대표 학생들이 모여 동시에 궐기해 격문을 배포하기로 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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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채는 도립병원 부근 낡은 주택에서 열린 비밀 대책회의에 참석했다고 증언했다. 박석기의 집이 있던 금계리는 당시 도립병원, 곧 현재 전남대학교병원 인근이다. 장소에 관한 두 기록은 서로 부합한다.
그가 이 회합을 지도했다는 중요한 근거는 광주여고보 백지동맹을 이끈 최순덕의 증언이다. 최순덕은 ‘경채 오빠’가 여고보 대표 한 명을 보내 달라고 부탁해 10일 밤 모임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그 자리에서 이경채는 광주여고보 학생들에게 중간시험에서 백지동맹을 전개하라고 지시했다. 최순덕은 회합에서 마련된 호소문 초안을 들고 같은 반 박지(朴智)의 집으로 가 밤새 약 150장을 작성했다. 여학생들의 시험 거부까지 제2차 시위의 계획 속에서 준비됐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최순덕의 증언은 제2차 시위가 남학생들의 거리 시위만으로 계획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여고보 학생들의 백지동맹은 거리에서 격문을 배포하는 행동과 방법은 달랐지만, 같은 날을 전후해 일제의 식민교육에 맞선다는 목적을 공유했다. 이경채가 각 학교의 사정을 고려해 서로 다른 투쟁 방법을 연결하고 있었던 사실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동안 제2차 시위의 설명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부분이다.
당초 거사일은 11월 11일이었다. 1교시 종소리를 신호로 각 학교가 궐기하려 했으나, 10일 밤 회합에서 장날인 12일이 더 효과적이라는 의견에 따라 날짜를 바꿨다. 11월 12일 광주 시내 전역에서 조직적인 제2차 항일시위가 전개됐다. 이 시위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됐다. 1928년 대맹휴의 계기가 된 이경채가 1929년에는 제2차 시위와 여학생 백지동맹을 지도한 것이다. 그는 11월 말 다시 체포돼 한 달가량 물고문 등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조직의 비밀을 지켰고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이후 국내 활동이 어려워진 이경채는 1931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전문학교 야간부에서 공부하했다. 신문 배달과 공사장 노동으로 생활하며 광주학생운동 동료들과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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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이봉창 의거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받은 그는, 중국 망명을 결심했다. 1933년 4월 28일 상하이에 도착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김철의 소개로 임시정부 계열 인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항저우에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고 이중환이라는 이름으로 『한국독립보』와 『진광』 발간에 참여했다.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 중국 국민정부와 공동 항일전선을 구축하려는 노력이었다. 김원봉이 재건한 남경 의열단에도 참여했다. 광주에서 학생들을 조직하던 이경채가 중국에서 외교적 연대와 무장투쟁을 함께 추진한 것이다.
1935년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산하 일본연구소에 들어간 그는 이일휘(李一輝)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정치·군사 상황을 연구했다. 1936년 9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3기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졸업하기 전에 전선에 배치됐다. 진성 장군 휘하 중국군 제11사단에 배속돼 상하이 인근 가정현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가 참전한 곳은 운하와 수로를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인 이른바 ‘크리크 전투’였다. 이경채의 회고에 따르면 중국군과 일본군이 포위와 반격을 거듭했고, 그가 속한 사단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약 1만 명 중 200명가량이 포위망을 벗어났다고 하는데 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후 일본군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중국군 정보장교로 활동하며 1938년 소교(소령), 1943년 중교(중령)로 진급하기도 했다. 그는 해방 때까지 중국 전선에서 항일전쟁에 참여했다.
1948년 12월 귀국한 이경채는 정치활동과 거리를 두다가 1977년 3월 부인과 함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80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97주년을 맞아 그의 역할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1928년 항일격문 사건은 대맹휴를 촉발했고 맹휴중앙본부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는 1929년 11월 12일 제2차 시위를 지도했고, 중국에서는 임시정부와 의열단을 거쳐 일본군과 싸웠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오랫동안 준비된 조직적 항쟁이었다. 그 출발과 전개의 중심에 이경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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