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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10-30 08:45 조회 3 댓글 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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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캐나다를 여행하며 4박을 기차 안에서 보냈다. 창밖으로 침엽수림과 호수가 몇 시간째 비슷한 얼굴로 이어지며 처음의 감탄이 무뎌질 무렵, 반드시 이곳에서 보리라 벼르던 영화 한 편을 틀었다. 거스 밴 샌트 감독의 '굿 윌 헌팅'이다. 개봉한 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인생 영화'로 꼽는 명작이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그동안 미뤄 왔다. 가장 맛있는 사탕을 마지막까지 아껴 두고 싶은 어린아이의 마음이었을 수도, 명작이라 불리는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실망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조심스럽고도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영화를 마주했다.
감정 외면한 채 머리만 쓰는 청년
주인공 윌 헌팅(맷 데이먼)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복도를 청소하는 스무 살 청년이다. 교수들도 몇 년을 매달릴 수학 문제를 복도 칠판에 슬쩍 풀어 놓고 사라질 만큼 비범한 재능을 지녔지만, 그는 그 재능을 숨긴 채 살아간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시답잖은 농담으로 시간을 죽이고, 시비가 붙으면 주먹부터 휘두르는 그의 모습에선 미래를 찾아보기 어렵다. 폭행죄로 수감될 처지에 놓인 그의 앞에 천재성을 알아본 제럴드 램보 교수(스텔란 스카스가드)가 나타나, 수학 연구와 심리 치료를 조건으로 그를 꺼내 온다.
영화 전반부 내내 윌은 사람들에게 날카롭다. 압도적인 지식과 두뇌 회전으로 상대를 논리적으로 공격하거나, 반격조차 어려울 만큼 조롱해 무너뜨린다. 하버드 근처 술집에서 친구를 깔보는 대학원생에게 미국 경제사 지식을 쏟아부어 망신을 주는 장면, 램보 교수가 주선한 국가안보국(NSA) 면접에서 국제 정세를 줄줄이 읊으며 면접관을 비꼬는 장면이 그렇다. 은인이나 다름없는 램보 교수나 사랑하는 스카일라(미니 드라이버) 앞에서도 예외는 없다. 그 날카로움은 다가온 사람들을 번번이 밀어낸다.
윌을 이해하려면 그의 성장 과정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고아였던 윌은 여러 위탁 가정을 전전했고, 양부로부터 끔찍한 학대까지 당했다. 아이는 양육자의 품에서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 무섭거나 화가 날 때 누군가 그 마음을 받아 주고 이름을 붙여 주는 경험이 쌓이면서, 아이는 감정이란 나를 집어삼키는 괴물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며 견딜 수 있는 것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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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윌에게 주어진 것은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심하게 맞거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라며 버려지는 경험이었다. 그렇게 윌의 마음속에는 '세상은 언제든 나를 버릴 수 있는 위협적인 곳'이라는 믿음, 그리고 '감정을 표현하면 버림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래서 윌은 감정 대신 머리를 쓰는 법을 익혔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를 주지화(Intellectualization)라고 부른다.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논리와 지식의 영역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그 감정과 안전한 거리를 두는 방어기제다. 치료자로 만난 션 맥과이어 교수(로빈 윌리엄스)의 말이 이를 정확히 짚는다. 넌 미켈란젤로에 대해 누구보다 해박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시스티나 성당에서 천장을 올려다볼 때 어떤 냄새가 나는지는 모를 거라고. 사랑에 관한 시는 읊을 수 있어도, 누군가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 본 적은 없을 거라고.
감정을 외면하다 보면 결국 자기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조차 모르게 된다. 스카일라와의 관계가 그렇다. 첫 데이트 후 윌은 다시 연락하지 않는다. 그녀를 더 알게 되면 그 완벽함이 깨질까 봐서라고 둘러대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는 '나를 알아갈수록 나의 결핍과 불완전함이 그녀를 실망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다. 관계가 깊어진 뒤 스카일라가 캘리포니아로 함께 가자고 하자, 윌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짓말로 그녀를 떠난다. 세상은 늘 자신을 버려 온 곳이기에, 또다시 상처받을 바엔 먼저 떠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선제적 이별을 택하면 적어도 무방비하게 상처 입는 일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고, 근원적인 외로움은 깊어만 간다.
"네 잘못이 아니야"가 닿기까지
몇 명의 치료자가 포기한 윌을 마지막으로 맡게 된 건 션이다. 그도 처음부터 노련하지는 않았다. 첫 만남에서 윌이 션의 그림을 빌미로 세상을 떠난 아내를 모욕하자, 션은 윌의 목을 움켜쥐고 다시 한번 아내를 욕보이면 끝장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그는 이전 치료자들과 달리 물러서지 않았다. 윌이 한 시간 내내 입을 다물면 함께 침묵을 견뎠고, 적절한 순간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윌의 방어벽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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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잠결에 내던 방귀 소리 같은 사소한 결。이 지금은 가장 그리운 기억이 되었다는 고백은, 윌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불완전함'이 실은 관계를 깊게 만드는 재료라는 것을 넌지시 알려 준다. 두 사람의 교감하는 시간이 쌓이며 윌은 조금씩 변해 간다.
션이 그렇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역시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에게 맞으며 자란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이런 치료자를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고 불렀다.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견뎌 본 사람이 타인의 상처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른 치료자들이 열지 못한 윌의 마음이 션에게 열린 것도, 자신의 아픔을 통해 윌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션의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진료를 하다 보면,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화려한 상담 기술이나 정확한 통찰이 아니라는 걸 느낄 때가 많다. 당장 답을 줄 수는 없지만 너와 함께 여기 있겠다는 마음, 이 고통의 시간을 함께 견디겠다는 마음이야말로 단언컨대 가장 큰 치유의 도구다. 그 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담자에게 가 닿는다. 그때 상처받은 내담자는 비로소 세상이 위협적이기만 한 곳은 아니며, 마음을 꺼내 놓고 위로받는 경험이 많은 것을 정화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 후반부, 학대의 기억을 꺼내 놓는 윌에게 션은 말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 윌은 가볍게 대꾸한다. “알아요.” 같은 말과 대답이 반복된다. 윌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다음에는 언성을 높여 날카롭게 받아치다가, 이윽고 션을 밀쳐내며 화를 낸다. 그리고 몇 번 더 같은 말이 이어진 끝에, 윌은 무너져 내리며 션의 품에 안겨 오열한다.
윌의 '알아요'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학대가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가 읽은 수많은 책이 이미 알려 주었을 테니까.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학대받은 아이들은 흔히 무의식적으로 '내가 나빠서 맞았다'고 믿는다. 나를 돌봐야 할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인정하기보다, 내가 나쁜 아이라서 벌을 받았다고 믿는 편이 차라리 견딜 만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으면 적어도 '내가 변하면 세상이 안전해질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남는다. 이렇게 뿌리내린 믿음은 단단한 벽에 둘러싸인 채 마음 깊숙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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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벽을 허물려면 지치지 않고 문을 두드리는 치료자의 노력이 필요하다.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션과 .차 달라지는 윌의 반응은 그 과정을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
끝없는 길을 달려가는 차
영화의 말미, 윌과 션은 상담을 마무리한다. 윌에게는 램보가 주선한 좋은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고, 션은 학교를 쉬고 여행을 떠나 자신의 마음을 돌보려 한다. 그러나 '진짜로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 보라던 션의 말을 떠올렸던 걸까, 윌은 일자리 대신 스카일라를 찾아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끝없이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윌의 차를 멀리서 비추며 영화는 끝난다.
나에게 이 장면은 치유의 완성보다는 새로운 시작처럼 느껴졌다. 결정적인 사건이나 한마디 말을 계기로 상처를 완전히 털어내고 새로 태어나는 일은 현실에선 드물다.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바꿔 나가는 과정은 부침의 연속이다. 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이전과 달라졌지만, 또다시 스카일라와 다투는 날이 오면 오래된 두려움이 고개를 들며 떠나고 싶어지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래도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만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번은 도망치지 않고 버텨 보고, 한 번은 감정을 숨기는 대신 말로 꺼내 보면서, 조금씩 달라져 갈 것이다.
진료실에서 회복이 더디다며 치료를 그만두는 분들을 종종 본다.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운 분들에게 그 기다림이 얼마나 답답할지 잘 안다.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마음의 습관은 몇 번의 상담만으로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윌의 변화 역시 끊임없이 마음을 두드린 션의 노력과, 치료라는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은 윌 자신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변화가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임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가 끝나고 눈을 돌린 창밖은 어느새 끝이 보이지 않는 대평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몇 시간째 비슷한 숲과 호수가 이어져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기차는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회복도 그렇다. 지루하고 더디게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쌓아 가는 경험의 조각들은 조금씩 오래된 상처를 덮어 간다. 그러니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고 쉽게 내려놓지 않았으면 한다. 길 위를 달려 나가는 윌의 낡은 자동차처럼, 우리 각자의 치유의 여정도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오동훈 연세온정신건강의학과의원 대표원장
마음은 굳이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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