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게임
페이지 정보

본문
릴나라주소
바다이야기#릴게임
바다이야기게임다운로드
바둑이 게임 잘하는 법 릴박스
야마토게임다운로드
릴게임가입머니
온라인릴천지 아키하바라 파칭코 하는법
야마토게임무료다운받기
파칭코팁디시
일본슬롯머신 바다이야기꽁머니환전
손오공게임다운 바다이야기 대표
바다이야기환전
바다이야기pc버전
바다이야기프로그램
야마토게임장 바다이야기 게임 방법
파칭코 기계 구입
바다이야기 고래 출현
바다이야기확률 온라인 바다이야기
사이다쿨릴게임
게임몰
오리지널골드몽 바다이야기룰
세븐랜드하는법 릴게임알라딘
골드몽릴게임사이트 파칭코 기계 고르는법
릴게임몰 바둑이잘치는법
카카오야마토게임장
바다이야기합법 아키하바라 파칭코 하는법
릴게임가입머니 골드몽사이트
야마토2 릴게임 파칭코 바다이야기 하는법
카지노릴게임 바다이야기배당
바다 이야기 기계 온라인파칭코게임
황금성사이트 파칭코모바일게임
바둑이카드 바다이야기비밀코드
체리마스터하는법
바둑이포커 게임랜드릴게임
바다이야기하는법 1엔 파칭코 디시
바다이야기예시 빠칭코 하는 법
연길은 거리부터 한글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만 못하다. 그래도 한글이 줄어들고, 사라져가는 거리에서 조선문 책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신화서.이다. 신화서. 2층에 가면 조선문 책이 별도 서가로 구성되어 있다. 그곳에서 반갑게 김학철 소설을 만날 수 있었다. 활판인쇄로 찍은 귀한 김학철 소설을 몇 권 산 뒤 김학철문학관으로 향했다. 소설가이자 태항산 호가장전투의 결사대원 김학철. 그의 흔적을 연길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기자말>
나는 국제호텔 앞에서 다시 차에 올라 신화서.으로 향했다.
태항산 호가장전투의 결사대원의 수를 아주 독특하게 기록했다. 4.5인의 전사들. 현장에서 전사한 4명을 온전한 전사로, 포로가 되어 다리 하나를 절단하고 살아남은 자신을 0.5인으로 계산했다. 1945년 실록 <아아, 호가장전투>에서 그는 4인의 전사는 장렬하게 전사하고 살아남은 0.5가 그들의 이야기를 쓴다고 밝혔다.
'0.5인의 전사'를 자처한 김학철의 운명은 아이러니였다. 그날 포로가 된 그는 다리 하나를 잘라내고 전투력을 완전히 잃은 대신 기억의 전장을 지키는 마지막 전사로 남은 '0.5'를 채우는 불굴의 전투력을 발휘했다. 그가 살아남아 기록하지 않았다면 호가장전투와 그곳에서 죽어간 전사들의 존재는 어떤 기억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지워지고 잊혀졌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항일전선의 전사들처럼.
그는 살아남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기억해야 하는 0.5가 된 그는 무엇을 기록했고, 그 기록은 어떻게 남았을까.
인민로 91번지 신화서. 앞에 차가 멈춰섰다. 어디에서나 서.은 반갑고 정겹지만, 연길의 신화서。은 더 특별하다. 외국에 나가 어디에서 우리말로 된 책을 이렇게 많이 만날 수 있겠는가. 서。의 1층은 아동도서와 문구.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듯이 신화서。도 줄어드는 수입을 문구와 팬시 상품으로 채우는 모양이다.
조선문 책은 2층에 있다. 조선문 책이 차지한 서가는 예전에 비하면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범도>를 쓰기 위해 취재를 다닐 때만 해도 연길 신화서。은 노다지였다. 조선문 책이 압도적이었다. 연길뿐만 아니라 하얼빈, 북경의 출판사에서 펴낸 조선문 책들도 즐비했다. 나는 이 서.에서 보물 같은 자료들을 발견하고 횡재한 기분이 되곤 했었다.
릴게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펴낸 <항일련군의 조선족 녀전사들>, 민족출판사에서 펴낸 <조선족 구술 시리즈>를 만난 것도 이 서。에서였다.
눈에 띄는 신간도 많이 줄어 아쉽다. 그래도 우리글로 된 책을 만드는 이들이 아직 남아 있고, 책을 사고, 읽는 이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마웠다.
"와, 여기 죄다 김학철 소설이다!"
소설가 지망생 한 명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조선문 서가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책은 역시 김학철의 소설이다. 김학철은 중국에서 '조선족 노신'으로 불린다. 김학철의 소설과 산문집은 조선문뿐만 아니라 중국어로도 나와 있다. 한국에서도 나와 있는 책들이지만 나는 그의 작품 몇 권을 사서 좋아할 만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국에서 나온 책이 디자인도 세련되고 종이의 질도 좋은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에서 공들여 만든 책에 스민 향기를 따라갈 수는 없다.
그리고, 누군가 한 권씩이라도 사주어야 조선문 책을 또 만들 것 아닌가. 나도 한 권 챙겼다. 활판인쇄로 찍은 오래된 책이었다. 활자를 뽑아 찍은 책은 뒷면에 글자가 비친다. 같은 호수의 활자가 모자랐는지 본문에 크기가 조금 다른 글자도 더러 눈에 띄었다. 이건 흠이 아닌 '활판인쇄 인증'이다.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활자를 심은 조판공이 활자가 부족한 '인쇄소의 사정'을 독자인 나에게 알려주는 암호다.
▲ 신화서. 앞에서 우리글로 된 책을 만날 수 있는 신화서.
ⓒ 방현석
반엘리트주의 표상 '전쟁할 때' 문정일
서。을 나와 차를 타고 김학철문학관으로 향했다. 나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간판을 바라보았다. 올 때마다 한글이 사라지고 크기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진다. <범도>를 시작하던 16년 전에는 거의 모든 간판이 한글이었다. 큰 글자 한글 밑에 작게 한자가 매달려 있는 게 당연했다. 지난 16년 사이에 가장 크게 변한 것이 바로 이 글자의 자리다. 한글과 한자의 자리가 완전히 바뀌었다. 한자는 대문짝만하게 커지고 한글은 주먹만하게 줄었다. 아예 한글 표기 자체가 없는 한자 간판들도 많아졌다.
한글이 줄어들고, 사라져가는 거리를 달리며 나는 김학철의 삶과 문학, 김학철이 지키려고 했던 모국어의 운명을 생각했다.
신화서。을 출발한 차가 국자가를 거쳐 국자교를 건넌다.
국자가는 연길의 강남과 강북으로 이어지는 연길의 가장 오래된 중심 거리다
바다이야기릴게임
. 연길의 옛 이름이 국자가였다. 국자가가 곧 연길이었던 시절, 이 거리에 박서양이 세운 병원이 구세의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의사 면허를 받았던 박서양은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대한국민회 군대의 군의였다. 그는 이 국자가에 세상을 구하는 의원, 구세의원을 운영하면서 만주에 민족학교 8개를 세웠다.
박서양이 걸었을 국자가의 끝에서 차가 우회전을 했다. 그리고 곧장 직진하던 차가 김학철이 마지막 살았던 집 골목 앞에 멈춰섰다. 연길시 총류가 2-2-4, 노간부사택. 집 앞 골목에 나와서 기다리고 계시던 김학철 선생의 아드님, 김해양 선생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 일행을 맞아주신다.
그의 살림집이자 집필실이었던 낡은 아파트 2층 현관문에는 바래서 희미해진 종이 한 장이 붙어 있다.
-한가한 사람은 문을 두드리지 마시오.
김학철 선생은 시간을 아꼈다. 시간을 지켜 사람을 만났고,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현관문에 붙어 있는 한인막고문(闪人莫敲门), 이 다섯 글자는 간난신고 속에서도 시간에 엄격했던 그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김학철문학관>으로 바뀐 그의 집은 작지만 김학철의 삶과 문학으로 가득 찬 크나큰 집이다.
▲ 김학철 선생이 마지막까지 사용하셨던 창고 연길시 총류가 2-2-4, 노간부사택. 이곳에 김학철 선생이 마지막까지 사용하셨던 창고가 있다.
ⓒ 방현석
언제 어디에서나 약자와 진실의 편에 섰던 김학철의 삶은 간난신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학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격정시대>와 <항전별곡>, <태항산록>을 읽으면 뜻밖의 김학철을 만나게 된다. 이보다 더 유쾌하고 익살스러울 수가 없다. 비장한 투사의 얼굴 뒤에 가려진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김학철이 주목한 인물은 대단하고 모범적인 엘리트들이 아니었다. 모자라고 허술하며, 때로 불량하기까지 한 인물들이 어떻게 결정적인 순간에 한몫을 하는지, 놀랍게 보여주는 것이 김학철의 소설이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문정일이다. 황포군관학교 시절 김학철의 동기 문정일은 모두 가장 힘들어하는 완전군장 구보훈련 중에도 희희낙락이다. 숨이 차서 끙끙거리는 김학철에게 자기 칼집을 가리키며 놀린다.
"이 맹추야. 나처럼 이렇게 좀 못해?"
문정일의 칼집에는 칼이 없었다.
바다이야기사이트
김학철이 물었다.
"그럼 칼은 어디다 치우구?"
"자리 밑에다 치우지 어디다 치워? 맹추 같으니!"
문정일에게 '맹추'는 욕이라기보다 '친애하는 친구'쯤 되는 말이었다.
그는 훈련 성적도 영 신통치 않았다. 훈련시간에 한눈을 팔며 딴 생각을 하는 문정일에게 중대장이 물었다.
"어이, 가련한 인생. 산병반군이 뭔가?"
산병반군은 적을 아군의 포위망 속으로 집어넣어 소멸시키는 전투대형이었다. 한나절 내내 훈련한 이 대적 전술형식을 묻는 중대장의 질문에 한참을 머뭇거리던 문정일이 내놓은 대답이 걸작이었다.
"전쟁할 때 쓰는 겁니다."
그날부터 '전쟁할 때'가 그의 별명이 되었다. 그러나 김학철은 문정일의 그런 일면만 보고 그를 규정하지 않았다.
조선의용대가 태항산 전선으로 가는 위험하고 힘겨운 이동작전을 완벽하게 수행한 주역이 바로 문정일이었다. 그는 여섯 달에 걸쳐 단 한 사람의 손실도 없이 대원들을 이동시켰다. 김학철의 부대가 맹진나루터에서 도강을 하지 못하고 발이 묶인 채 쩔쩔매고 있을 때 나타나 거침없이 국민당 군대와 담판을 벌여, 단박에 길을 여는 문정일의 수완은 가히 눈부셨다. 김학철의 소설에는 이런 문정일들로 가득하다.
돼지 살코기는 김학철에게 주고 자신은 비계만 먹던 주혁, 미투리 삼는 솜씨가 천하일품이었던 하직동, 노래를 잘 불러 '도라지'라는 별명을 얻은 한득지, 세상 돌아가는 꼴을 늘 개탄해서 '우국지사'로 불렸던 김경운...
김학철은 항일투사들을 동상처럼 만들지 않았다. 웃고, 떠들고, 실수하고, 욕하고, 먹고, 싸우고, 때로는 겁먹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 몫을 해내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 기록했다.
▲ 김학철문학관 김학철 선생의 생의 마지막을 보낸 연길 노간부숙사(현 김학철문학관)를 설명하는 최원호 관장.
ⓒ 방현석
살아남은 자의 마지막 임무
그에게 기록은 기억의 다른 이름이었다. <항전별곡>에서 그는 기억나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는다.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였던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썼다. 그럼으로써 그가 기억한다고 기록한 수많은 이름과 장소, 표정과 별명은 확고한 신뢰를 얻었다. 김학철에게 사람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라지지 않게 지키는 일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김학철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아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릴천지릴게임
.
아들로서 지켜보았던 김학철의 삶을 시종 유쾌하게 설명하던 김해양 선생이 여기에 이르러서는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한국방문 중에 의료사고를 당한 김학철은 회생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연길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김학철은 서울에서 의료사고를 당하고도, 단 한 마디도 항의하지 않았다.
"김학철은, 호의에 감사한다고만 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연길로 돌아와서 존엄사를 선택하고 유서를 썼습니다."
아들 김해양 선생은 우리 앞에서 아버지 김학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 김학철을 객관적으로 말하기 위해 그는 '김학철은', '김학철이' 라고 불렀다.
"김학철의 유서는 이렇습니다."
김학철은 자신의 뜻을 말이 아닌 글로 정확하게 고정시켰다. 김학철이 변경할 수 없는 글로 고정시킨 유서는 이렇다.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련련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병원·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게 해달라.
김학철은 자신이 글로 고정시킨 뜻을 행동에 옮겼다.
단식에 들어간 그가 살아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동지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아들 김해양에게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사진을 가지고 오게 해 확대경을 들고 옛 전우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었다. 어디 출신인지, 어떤 별명을 가졌는지, 어떻게 살고 어디에서 싸웠는지 받아 적게 했다.
단식으로 생의 남은 시간을 줄여가던 그는 왜 마지막 남은 힘으로 그 일을 했을까. 자기가 죽고 나면 그들 이름을, 그들의 얼굴을 기억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태항산에서 동지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주었던 벗들, 항일무장투쟁 전선에서 바람으로 흩어진 전사들. 김학철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동지들의 이름을 남기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겼다.
김해양은 김학철이 마지막으로 앉았던 책상 앞에서 그날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단식으로 제대로 몸을 가누기 어려웠어요. 제가 쉬었다가 다음에 하자고 했는데, 이 일을 내가 하지 않으면 영원히 역사의 퀴즈가 될 거야, 라고 하면서요."
그것이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이 마지막으로 수행한 임무였고, 작가 김학철이 남긴 마지막 기록이었다.
최후의 순간이 임박했을 때 김학철은 아들 김해양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부고를 내지 마라.
추도식을 하지 마라.
게임몰릴게임
일체 부조금을 받지 마라.
화장한 후에 유골함 대신 우체국 종이 우편 박스를 사서 담아 두만강에 띄워보내라. 고향 원산 앞바다로 돌려보내라.
마지막 가는 길에는 조선의용군 추도가와 황포군관학교 교가를 불러주어라.
아들 김해양은 그의 뜻대로 추도식 없이 <조선의용군 추도가> 속에 김학철을 두만강에서 떠나보냈다. <조선의용군 추도가>를 지은 사람이 김학철이었다. 젊은 날 전장에서 가던 길 '다 못 가고 쓰러진' 동지들을 위해 지었던 노래를 들으며 먼저 간 동지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김학철이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은 짧았다.
"편안히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맞서라."
이 유언은 그가 지은 멋진 문장이 아니었다. 김학철이 살아낸 삶이 쌓여 이 한 문장으로 남은 것이었다. 태항산에서는 전우들을 살리기 위해 싸웠고, 일본 감옥에서는 죽은 동지들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전향서를 쓰지 않았다. 사회주의 중국에서는 자신이 믿었던 사회주의의 정신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중국의 모든 작가들이 침묵할 때 마오쩌뚱의 1인 독재를 비판하는 <21세기의 신화>를 용감하게 썼다. 그 글로 징역 10년을 살고, 강제노역 21년을 하면서도 끝내 단 한 장의 반성문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동지들의 이름을 남겼다.
그에게 총과 문학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총을 들고 지키려 했던 사람들과 펜을 들어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다르지 않았다.
쓰지 말아야 할 것은 다리를 떼어주면서도 쓰지 않았고, 써야 할 글은 목숨을 걸고 쓴 작가였다. 김학철에게 어울리는 기념비는 거대한 동상일 수 없다.
김해양 선생은 문학관을 나서기 전에 내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모옌이 쓴 시 한 편을 보여주었다. 모옌이 김학철의 삶과 문학 앞에 바친 헌시의 마지막 구절, 이렇게 끝난다.
김학철에게는 따로 기념비가 필요치 않다.
태항산 전체가 그의 기념비다.
김학철은 평생을 약자와 진실의 편에 섰다. 두 다리가 멀쩡한 사람들이 차례로 무릎을 꿇을 때 끝내 외다리로 서서 버텼던 사람이 김학철이었다.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를, 끝내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로 답한 작가였다. 그가 있어 우리 현대문학은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 조선의용대 결사대원 4전사자 묘역 묘역을 참배하는 필자와 김해양 선생, 그리고 호가장 주민 대표.
ⓒ 방현석
5'를 채우는 불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