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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존중 없는 사회’, 성과 경쟁과 디지털 소통 속 고립의 원인 진단 자기 착취와 지위 불안에서 벗어날 길로 경청·정중함·‘우정의 정치학’ 제시
‘피로사회’에서 성과를 좇으며 자신을 소진하는 인간을 분석했던 저자는 이번 책에서 존중과 자존감, 공동체의 유대를 함께 살핀다. 사람들은 왜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하는가.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노력이 어째서 타인을 경멸하고 자신까지 혐오하는 일로 바뀌는가. 책은 이 물음을 능력주의와 디지털 문명의 문제로 풀어낸다.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성과사회에서 인간은 존재 자체로 존중받기 어렵다. 능력과 가치를 계속 입증해야 한다. 돈과 지위를 얻기 위한 경쟁이 일상을 차지하면서 휴식 시간까지 자신을 관리하고 평가하는 데 쓴다. 자기실현을 위해 일한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자신을 착취하는 상태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 경쟁은 개인의 피로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이 공공심과 공동체의 유대를 약화시킨다. 저자는 승자독식 체제가 패배자를 만들어내고, 지위에 대한 불안을 여러 계층에 퍼뜨린다고 분석한다. 존중을 얻기 위한 경쟁이 오히려 서로를 존중할 여유를 빼앗는다는 역설이다.
책은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노와 폭력을 한스 엔첸스베르거의 ‘분자적 내전’ 개념으로 설명한다. 뚜렷한 적이나 목적이 없는 분노가 불특정 다수를 향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공격한다. 사회적 고립과 자기혐오를 개인의 성격이나 의지 문제로만 다룰 수 없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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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도 비판의 대상이다. 저자는 디지털 공간에서 존중을 얻는 일이 관심을 끄는 일로 바뀌고,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평가한다고 지적한다. 비슷한 의견만 접하는 정보 버블과 익명성이 맞물리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 어려워진다. 상대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소통에서는 욕설과 폭로에 제동을 걸 배려도 약해진다는 것이다.
의견 차이가 곧 적대 관계로 바뀌는 정치적 대립도 살핀다. 책은 자기 의견을 정체성과 동일시할 때 타인의 반론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기 쉽다고 설명한다. 민주적인 대화와 타협을 위해서는 의견과 정체성을 분리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하버마스의 견해를 소개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우정의 정치학’이다. 친구를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기보다 독립된 다른 존재로 인정하는 관계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귀를 기울이는 일이 그 출발이다.
재즈 연주자들의 협주도 대안의 사례로 등장한다. 리처드 세넷이 제안한 ‘음향공동체’에서는 서로를 견제하기보다 다른 연주자의 소리를 듣고 협력하는 일이 중요하다. 저자는 여기서 상호 존중과 공공심의 가능성을 찾는다.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제시한 평등한 기본권, 공동체적 유대, 자기존경의 관계도 함께 다룬다.
솔직함을 무조건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에는 의문을 던진다. 사적인 분노를 가감 없이 쏟아내는 행동이 공적 대화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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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예의와 정중함을 상대의 사적 영역을 보호하는 형식으로 설명한다. 모든 것을 드러내고 털어놓는 친밀함보다, 서로를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거리가 존중을 지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가치와 이상, 본보기의 쇠퇴도 책의 주요 논제다. 저자는 디지털 자본주의에서 인간까지 생산과 소비의 대상으로 취급되는 현실을 비판한다. 공동체의 신뢰를 뒷받침하던 권위가 사라진 자리에 불안과 방향 상실이 생기고, 그 공백이 포퓰리스트와 독재자의 출현을 부추길 수 있다고 분석한다.
수치심을 다룬 부분에서는 타인을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수치심 주기’를 살핀다. 상호 존중을 돕는 도덕적 감정이었던 수치심이 남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쓰일 때 사회를 해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은 모욕을 당한 사람이 몰염치와 냉소로 자신을 방어하는 문제까지 짚는다.
짧은 문장과 시적 언어는 한병철의 철학적 주장을 전달하는 주요 방식이다. 압축된 철학 개념을 읽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번역을 맡은 정창호 박사가 해설과 주석을 붙였다. 출판사는 중고생도 읽을 수 있도록 이해를 돕는 데 초。을 맞췄다고 설명한다.
한병철은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에서 독문학과 신학, 철학을 공부했다. 1994년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과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피로사회’, ‘타자의 추방’, ‘권력이란 무엇인가’, ‘에로스의 종말’ 등이 있다.
PS. 서로의 .수표를 들여다보느라 바빴다면, 이번에는 서로의 말을 들어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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