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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남산을 오르는 남산골한옥마을의 입구. 추석연휴 기간이라 많은 사람들로 크게 붐볐다.
ⓒ 전갑남
지난달 26일, 서울의 한가운데 우뚝 솟은 남산을 찾았다. 남산골한옥마을 마당에 들어서니, 판소리 페스티벌을 비롯한 한가위 축제로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시끌벅적하고 정겨운 잔치판을 뒤로하고 우선 남산 정상부터 다녀오기로 마음을 정했다. 구경은 내려와서 천천히 즐겨도 늦지 않을 터였다.
저 멀리 남산타워가 손에 잡힐 듯 빤히 바라보인다. 서울의 영원한 랜드마크. 도심 어디서나 고개를 들면 우러러보이던 그 타워를 향해 첫 발을 내디뎠다.
안내판을 보니 이곳에서 정상까지 걸어서 50여 분이 걸린다고 적혀 있다. 오르는 길 대부분이 경사진 산길과 계단이라 조금 숨이 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작 한 시간 남짓의 산길에 겁을 먹을 내가 아니다.
"자, 한번 천천히 걸어보자꾸나."
스스로에게 나지막이 경쾌한 주문을 걸며 한옥마을의 기와지붕들을 뒤로하고 호젓한 산길에 들어섰다.
솔바람 길 따라 만난 옛 한양도성과 '목멱산'
한옥마을을 조금 벗어나자 복잡한 도심의 소음은 차츰 아득해지고, 짙은 나무 향이 코끝을 알싸하게 감싼다. 남산의 푸른 숲이다.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뚫리는 참으로 청량한 공기다.
▲ 남산 오르는 길에는 멋진 소나무들이 길손들을 반겨주었다.
ⓒ 전갑남
울창한 소나무 사이에 난 산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소나무가 있는가 하면, 긴 세월의 비바람을 견디느라 기묘하게 굽어버린 나무도 있다. 서울의 수많은 애환과 격동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나무들이라 생각하니, 왠지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진다.
굽이친 소나무 줄기를 바라보다 문득 애국가 한 구절이 귓가에 환하게 울려 퍼진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애국가 속 소나무가 꼭 이곳의 나무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겠지만, 눈앞에 펼쳐진 푸른 숲을 보고 있노라니 그 구절이 한층 절절하게 마음에 와닿는다. 그동안 노래로만 무심히 부르던 남산을 오늘 이렇게 두 발로 정직하게 밟으며 걷고 있다.
편안하게 이어지던 숲길이 끝나자 본격적인 계단길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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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계단, 또 한 계단 정성껏 오르다 보니 어느새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다. 하지만 숨이 턱에 찰 즈음이면 정겨운 흙길과 다정한 데크길이 번갈아 나타나 걸음을 다독여준다.
▲ 남산 계단길을 오르다 한양도성을 만났다. 남산 정상부까지 도성이 길게 이어져 수도서울의 옛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 전갑남
정상이 가까워질 무렵, 묵직한 돌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양도성 성곽이다. 몇 년 전 남대문에서 출발해 성곽을 따라 거닐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그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성벽을 오르는 길목에서 다시 만나니 참 반갑고 고마운 구장(舊交)을 만난 듯하다.
돌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성벽이 남산의 능선을 타고 이어진다. 한양도성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둘러싼 성곽이었고, 남산은 도성의 남쪽에 자리한 안산(案山)이었다.
성벽을 찬찬히 바라보다 문득 내가 사는 강화도의 돈대들이 떠올랐다. 돈대를 찾아다니며 보았던 여장과 성벽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서울 남산에서 강화의 돈대를 만난 듯해 조금 놀랍고 반갑다. 서울과 강화, 서로 다른 곳에 남아 있지만 성곽의 돌에는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이 닮아 있나 보다.
서울을 걷다 보면 이처럼 뜻밖의 선물 같은 만남을 즐기게 된다. 한옥마을에서 옛집의 고즈넉함을 만나고, 산길에서 푸르른 소나무를 만났는데, 조금 더 걸으니 옛사람들의 숨결이 켜켜이 배어 있는 성곽이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지 않는가.
문득 남산의 옛 이름이 떠오른다. 바로 '목멱산(木覓山)'이다. 조선시대 남산에는 국사당이 있었고, 목멱산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태조는 목멱산을 목멱대왕으로 삼고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는 국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국사당은 192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인왕산 기슭으로 옮겨졌고, 지금 팔각정이 자리한 곳에는 그 터를 알리는 표석이 남아 있다.
오늘날에는 그저 '남산'이라 편하게 부르지만, 서울 한가운데 우뚝 서서 시대와 사람을 지켜보고 품어준 그 의미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남아 있으리라.
팔각정 아래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과 영원의 약속
▲ 서울의 랜드마크라 할수 있는 서울타워가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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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갑남
마침내 다다른 남산 정상부. 가장 먼저 손을 뻗어 반겨주는 것은 역시 남산타워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찌를 듯 솟은 타워를 바라본다.
그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산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남산은 조선시대부터 도성의 남쪽에 자리한 중요한 산이었다. 정상에는 변방의 소식을 알리던 목멱산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 터와 복원된 봉수대를 볼 수 있다.
그 주변에는 운치 있는 팔각정이 자리하고 있고, 연휴를 맞아 찾아온 수많은 인파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
▲ 남산 팔각정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잠시 쉼을 즐기고 있었다.
ⓒ 전갑남
팔각정에 올라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힌 뒤, 탁 트인 전망으로 눈길을 돌렸다. 눈앞으로 장쾌하게 펼쳐지는 서울의 풍경에 가슴이 시원스레 열린다. 멀리 북한산과 북악산을 비롯한 산들이 서울을 둘러싸고 있고, 빽빽한 빌딩 숲 사이로 한강이 유유히 흐른다. 도심 곳곳에 자리한 옛 궁궐의 모습도 정겹게 눈에 들어온다.
이토록 아름다운 서울이 어찌 그냥 이루어졌을까. 한성백제 시대부터 한강 유역은 오랫동안 중요한 삶의 터전이었고, 조선은 이곳에 한양을 세워 수도로 삼았다. 남산에 올라 서울의 지형을 한눈에 바라보니, 산과 물을 두루 품은 이곳이 왜 오랜 세월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이어진 공간이 되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잠시 걸음을 늦추고 서울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남산은 지나가는 계절과 세월의 흐름을 묵묵히 품어주는 아늑한 쉼터처럼 느껴진다.
▲ 남산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한 사랑의 맹세 자물통. 그 언약이 오래오래 굳게 지켜지기를...
ⓒ 전갑남
그런데 팔각정 주변 난간을 둘러보다가 이색적인 장관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난간과 주변 시설에 알록달록한 자물쇠들이 빼곡하게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다가가 보니 자물쇠마다 저마다의 이름과 소박한 글귀, 빛바랜 연도가 적혀 있다. 무엇이 그리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이기에 이토록 꼭꼭 잠가 두었을까.
젊은 연인들이 이곳을 찾아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며 걸어놓은 '사랑의 자물쇠'다. 자물쇠에 사랑의 마음을 담아 남산에 남겨두는 풍경은 어느새 이곳의 익숙한 모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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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히 매달린 자물쇠들을 바라보며 혼자 미소를 지어본다. 쇠붙이는 여전히 단단하게 매달려 있는데, 저 자물쇠를 걸며 수줍게 웃었던 청춘들은 지금도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을까.
아무튼 변치 않으려 애쓰는 그 예쁜 맹세들이 싫지 않다. 오랜 역사와 현대의 풍경이 공존하는 남산에 또 하나의 사람 냄새 나는 풍경을 만들어 놓았다. 남산은 그저 조용히 침묵할 뿐이다.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온 남산은 굳이 말로 대답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한양도성에는 옛사람들의 묵직한 발자국이 배어 있고, 난간에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풋풋한 사랑이 자물쇠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과거와 현재를 모두 품은 남산의 넓은 품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도, 사람들의 뜨거운 마음도 남산이라는 커다란 품 안에서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현대의 남산타워가 우뚝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까마득한 역사와 오늘을 살아가는 서울의 일상이 사이좋게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처음 남산골한옥마을에서 길을 나설 때만 해도 그저 정상까지 무사히 가보자는 단출한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내 두 발로 직접 걸어 올라와 보니, 그 길 위에서 참으로 많은 소중한 것들을 만났다.
소나무 숲에서는 가슴 뚫리는 청량한 바람을, 한양도성에서는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만났다. 팔각정에서는 눈부신 오늘의 서울을 내려다보았고, 알록달록한 자물쇠에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풋풋하고 진실한 사랑을 엿보았다.
▲ 남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수도 서울. 아름다운 서울의 모습을 한눈에 들여온다. 외국인들에게도 인기 명소가 되었다.
ⓒ 전갑남
남산은 그렇게 아득한 과거와 찬란한 현재를 한데 품고 있는 삶의 터전이자, 지붕 없는 역사 박물관처럼 느껴졌다.
산 밑에서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발걸음을 옮기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추석 연휴에 남산에 올라 서울을 굽어보니, 평소 무심히 바라보던 익숙한 도시가 오늘따라 참으로 새롭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소나무 사이로 솔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니 흐르던 땀도 시원하게 식고 마음마저 한결 가볍다.
서울의 초가을 풍경 한 자락과 남산이 내어준 시원한 바람을 가슴 깊이 담고 산을 내려가는 길. 올라올 때는 조금 숨이 찼지만, 성취감을 안고 내려가는 발걸음은 어찌 이리 가볍고 경쾌한지 모르겠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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