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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본 야마구치현의 한 데이서비스(노인 주간돌봄시설)에 도착한 이용자가 자신의 일정판 앞에 선다. 오늘 무엇을 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요리, 서예, 체조, 마사지, 심지어 '멍하니 있기'도 선택지다. 원하는 활동이 적힌 자석을 골라 일정판에 붙이면 하루 계획이 완성된다.
시설 안에서만 통용되는 화폐 '유메(夢·꿈)'도 쓴다.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 돈을 내고, 스스로 하루 계획을 짜거나 혈압을 재고 견학자를 안내하면 다시 돈을 번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고 잔액을 계산하는 과정 자체가 훈련이다. 시설 곳곳에는 계단과 경사도 일부러 남겨뒀다. 일상생활에서 마주칠 수 있는 장애물을 직접 경험하고 극복하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다.
2001년 문을 연 일본 야마구치현의 데이서비스 '꿈의 호수마을(夢のみずうみ村)'이다. 이곳의 돌봄은 '무엇을 해줄까'보다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서 출발한다.
우리나라보다 먼저 초고령사회를 겪은 일본에서는 이처럼 노인을 낮 동안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용자의 선택과 남아 있는 기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데이서비스가 변화해왔다. 제도 역시 소규모·개별 돌봄, 기능 유지, 자립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다만 모든 일본 데이서비스가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은 아니다. 소규모 시설의 경영난, 돌봄 인력 부족 등 풀어야 할 숙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정해진 프로그램 대신… "오늘 뭐 할지는 내가 고른다"
일본도 처음부터 이용자의 선택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아니다. 2000년 우리나라 노인장기요양보험과 비슷한 공적 돌봄보험인 '개호보험'이 도입된 뒤 데이서비스가 빠르게 늘었다. 당시에는 이용자가 기관에 도착하면 목욕, 식사, 체조, 레크리에이션 등을 정해진 일정에 따라 함께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변화는 제도보다 현장에서 먼저 시작됐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일반 주택 등을 활용해 치매 노인 몇 명을 소규모로 돌보는 '타쿠로쇼(宅老所)'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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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살던 집과 비슷한 환경에서 각자의 상태와 생활습관에 맞춰 돌보려는 시도였다. 일본 정부도 이후 이런 흐름을 제도 안으로 받아들였고, 2016년에는 정원 18명 이하의 소규모 데이서비스를 지자체가 관리하는 '지역밀착형'으로 따로 분류했다. 강원대 사회복지학과 이선영 교수는 "현장의 소규모 실천이 먼저 있었고, 이후 제도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기능 유지와 본인의 의사를 중시하는 방향이 더해졌다"고 말했다.
실제 도쿄 마치다시의 데이서비스 'DAYS BLG!'에서는 아침마다 그날 할 수 있는 일과 。심 메뉴 등을 보여주고 이용자가 무엇을 할지 직접 고른다. 누군가는 세차나 전단지 배포를 위해 동네로 나가고, 누군가는 센터에 남아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이곳에서는 이용자를 환자가 아닌 '멤버'라고 부른다. 무엇을 할지 직접 고르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남아 있는 인지기능을 사용하며, 스스로 고른 활동에는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성산노인복지센터 최태자 대표(전 한국주야간보호협회장)는 "고령자라고 해서 모두 같은 활동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며 "신체기능, 인지능력, 과거 직업, 취미, 성격 등이 다른 만큼 가능한 범위에서 본인이 원하는 활동을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필요 따라 달라지는 낮 돌봄… '세 시간 재활형'도
일본에서는 이용 목적에 따라 낮 돌봄 서비스도 나뉜다. 식사, 목욕, 일상생활 지원, 다른 사람과의 교류 등을 돕는 '데이서비스'가 있는가 하면,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등이 참여해 전문 재활을 제공하는 '데이케어'도 운영된다.
하루 종일 센터에 머무르는 대신 오전이나 오후 약 세 시간 동안 운동과 재활에 집중하는 단시간형 서비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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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의 사회복지법인 노테복지회 산하 '노테 겐키노데루사토(ノテげんきのでる里)' 사카모토 료(坂本 涼) 부시설장은 "오전과 오후로 이용자를 나눠 각각 약 3시간씩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시간형 서비스가 수가와 운영 측면에서 유리한 형태로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인력이 참여하면서 돌봄 내용이 달라진 사례도 있다. 사카모토 부시설장이 과거 근무한 치매 이용자 대상 데이서비스에서는 작업치료사가 없을 당시 노래 부르기, 그림 그리기 등 단체활동이 주를 이뤘다. 이후 작업치료사가 배치되면서 이용자의 과거 생활, 관심사, 신체기능에 맞는 활동을 제안하고, 집에서도 가족과 함께 이어갈 수 있는 과제까지 연결했다. 사카모토 부시설장은 이런 변화가 이용자의 활동 참여뿐 아니라 가족의 돌봄에도 도움이 됐다고 했다.
최태자 대표는 한국에서도 장시간 돌봄 중심의 운영에서 나아가 기능훈련 중심형, 단시간 재활형 등 이용자의 상태와 필요에 따라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도록 주야간보호의 기능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선택권 늘었지만… 소규모 운영·인력난 숙제
물론 모든 일본 데이서비스가 이용자에게 자유롭게 활동을 고르게 하는 것은 아니다. 2025년도 일본 후생노동성 위탁조사에서 이용자가 그날의 기분에 따라 지내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고 답한 기관은 46.8%였다.
이용자의 상태에 따라 선택을 돕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치매가 심해 말로 의사를 표현하기 어렵다면 사진이나 표정, 행동을 통해 선호를 파악할 수 있다. 반대로 새로운 활동을 계속 권하기보다 익숙한 장소와 일정한 일과를 유지해 주는 것이 안정에 도움이 되는 사람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 가짓수가 아니라 이용자의 상태와 의사를 얼마나 세심하게 살피느냐다.
소규모 돌봄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 이선영 교수에 따르면 치매 이용자를 소규모로 전담하는 일본의 데이서비스는 2015년 3787곳에서 2025년 2716곳으로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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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데이서비스보다 높은 보수를 지급해도 적은 이용자를 대상으로 충분한 인력을 배치하면서 운영비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인력 부족도 큰 과제다. 사이타마현 아사카시의 '안심 오세와쿠 광장 데이서비스센터(デイサービスセンター安心のおせわ~く広場)'에서 돌봄 직원으로 근무하는 남진욱 씨는 "현재 일본 돌봄 현장에서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문제는 인력 확보"라고 말했다. 남 씨가 근무하는 센터에서는 일본인과 함께 한국, 네팔,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등 다양한 국적의 직원들이 일한다. 남 씨는 "이제 외국인 직원은 단순히 부족한 일손을 보충하는 보조인력이 아니라 센터 운영을 지탱하는 필수인력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도 '프로그램 수'보다 '어떤 하루'인지를 봐야
일본의 방식을 그대로 국내에 옮기기는 어렵다. 이용자가 원하는 활동을 고르고 소그룹으로 나뉘어 생활하려면 그만큼 충분한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존 주야간보호센터를 모두 소규모 시설로 바꾸기보다 센터 안에서 이용자의 상태와 관심사에 따라 소그룹을 나누고 선택할 수 있는 활동을 늘리는 방식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다만 추가 인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인력 기준과 장기요양 수가도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이선영 교수는 "직원 한 명이 맡는 이용자가 많으면 개별화된 프로그램은 계획서에만 남고, 선택권은 시간이 남을 때만 주어지는 배려가 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센터를 평가할 때도 프로그램 개수보다 이용자가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참여했는지, 남아 있는 기능을 얼마나 활용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봤다. 결국 '무엇을 얼마나 많이 해줬느냐'보다 '이용자가 어떤 하루를 보냈느냐'에 주목하자는 취지다.
최태자 대표는 "주야간보호를 단순히 가족을 대신해 고령자를 일정 시간 돌보는 시설로만 인식하는 데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며 "고령자가 남아 있는 신체적·인지적 기능을 최대한 활용해 가능한 한 오랫동안 자신의 집에서 원하는 일상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앞으로 주야간보호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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