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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또렷하게 남고, 어떤 기억은 아스라한 이미지로 떠오르며, 어떤 기억은 망각 속에 묻힌다. 떠올린 기억이 실제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기억은 다른 기억의 잔재와 뒤섞이며 변형되기 때문이다. 때로 기억의 내용보다 선명한 것은 그 기억이 불러오는 느낌이다. 구체적인 사실은 잊어도 그 순간의 설렘과 기쁨, 슬픔은 오래 남는다. 신체극(피지컬 시어터) 형식의 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기억이 흩어지는 과정과 그 자리에 남는 감각을 몸과 음악으로 펼쳐 보이는 에세이 같은 작품이다.
쉰다섯 번째 생일을 맞은 톰은 치매를 앓고 있다. 딸 소피는 손님을 맞을 아버지에게 재킷과 빨간 넥타이를 준비해 준다. 하지만 톰은 딸을 아내의 이름인 이사벨라로 부르고 재킷을 입는 동작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다. 소피의 말은 흐릿해지고 '재킷'과 '빨간색'이라는 단서만 남는다. 옷걸이를 뒤지던 톰이 교복 재킷을 입자, 잊고 있던 시간이 무대 위에 되살아난다.
옷걸이 뒤에 놓인 사각형 단상은 톰의 기억이 재생되는 공간이다. 엄마가 머리를 빗겨주며 등교를 준비해 주던 아침, 무서운 선생님 앞에서 시험을 치르던 교실이 펼쳐진다. 친구 마이크와 장난을 치고 이사벨라와 쪽지를 주고받으며 영화관에서 몰래 입을 맞추기도 한다. 기억은 결혼식과 소란스러운 피로연, 임신의 기쁨과 유모차를 밀던 순간을 지나 아내를 잃은 교통사고의 순간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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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벨라와 함께한 사랑의 순간과 갑작스러운 이별이 저마다의 빛과 소리를 지닌 채 떠오른다.
기억 속 시간은 일정한 속도나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장면들은 빠르게 질주하다가 느려지고, 멈췄다가 앞선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대화가 또렷하게 들리다가 뭉개지고, 몸짓만 남기도 한다. 관객은 흩어진 기억의 조각을 퍼즐처럼 맞추며 톰의 사랑과 상실의 윤곽을 그려 나간다.
자전거 장면은 이러한 기억의 성질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이사벨라가 핸들을 잡기도 하고, 장난을 치다가 떨어진 톰이 자전거와 달리기 시합을 벌이기도 한다. 마이크까지 가세해 세 사람은 한 대의 자전거에 몸을 싣고 질주한다. 이것은 특정한 하루의 기억이라기보다 수없이 반복된 등굣길의 풍경이 포개진 것이다. 이처럼 기억은 정확한 사건의 순서 대신 인상적인 순간들이 겹쳐지고 축약되며 새로운 이미지로 재구성된다.
음악과 음향은 이처럼 뒤얽힌 시간의 흐름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라이브 연주는 기억이 선명해지거나 흐려질 때마다 달라지는 극의 속도와 호흡을 조율한다. 여기에 배우의 움직임이 긴밀하게 맞물리면서 톰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기억과 망각의 충돌이 무대 위에 드러난다. 배우들의 숙련된 움직임과 음악의 정교한 호응은 그 자체로 쾌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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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와 의자, 옷걸이에 걸린 옷가지가 무대를 구성한다. 간결한 무대와 소품은 기억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다. 교실과 집, 영화관, 결혼식장으로 공간이 바뀌어도 몇 개의 소품이 장소를 암시할 뿐, 나머지는 여백으로 남는다. 그렇게 장면을 이루던 사물마저 하나둘 사라지면서 톰의 기억이 허물어지는 과정이 눈앞에 펼쳐진다.
톰은 탁자를 붙들고 의자를 가져다 놓으며 기억의 장면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한쪽을 붙잡으면 다른 쪽이 사라진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사라져가는 기억을 그는 간절하게 붙잡으려 한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톰이 거친 숨을 몰아쉴 때, 이사벨라가 다가와 그를 안는다. 이 포옹은 기억을 되살리는 행위라기보다 그를 홀로 남겨두고 싶지 않은 마음의 반영일 것이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기억의 파편을 몽타주처럼 이어 붙이고 일상의 동작을 춤으로 확장해 시적인 이미지를 만든다. 마치 한 편의 감성적인 무성영화나 춤을 보는 듯 시청각적 이미지가 풍부하다. 톰과 이사벨라의 사랑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들의 사랑마저 망각 속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라진다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일이기에 더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망각의 고통과 사랑의 기쁨이 교차하는 70여 분의 무대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다양한 이미지와 음악의 잔상을 남긴다. 다음 달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된다.
로 흘러내리는 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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