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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11-06 02:53 조회 18 댓글 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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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혹독한 겨울, 숲을 사러 길을 나선 상인 바실리와 일꾼 니키타는 거센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는다. 돈과 이윤을 좇던 주인과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던 일꾼. 두 사람은 죽음의 문턱에서 무엇이 진정 소중한 것인지 마주하게 된다.
러시아 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주인과 일꾼>이 한국의 판소리로 다시 태어났다.
지난 10월 23일부터 24일까지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에서 공연된 이자람의 창작판소리 <눈, 눈, 눈>이다. 2025년 초연된 이 작품은 올해 7월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공식 초청작으로 무대에 올랐으며, 이번에는 1300석이 넘는 대극장에서 국내 관객과 만났다.
무대 위에는 소리꾼 이자람과 고수 이준형, 그리고 북과 부채가 있다. 눈 덮인 러시아의 광활한 설원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무대장치는 없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자 관객들은 어느새 차가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러시아의 겨울 한복판에 들어서게 된다.
부채 하나에 객석에 눈보라가
▲ 눈,눈,눈 LG아트센터에서 2026년 10월 23일-24일 공연 된 이자람 판소리 '눈,눈,눈'
ⓒ 장혜정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관객이 직접 눈보라를 만들어내는 순간이었다.
이자람은 공연 초반 관객에게 '얼씨구', '좋다', '흐음'과 같은 추임새를 가르친다. 판소리에서 추임새는 소리꾼의 노래에 관객과 고수가 호응하며 흥을 돋우는 표현이다. 판소리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도 짧은 연습을 거치면서 공연에 참여할 준비를 한다.
이어 이자람은 부채를 흔드는 세기에 따라 강·중·약으로 바람 소리를 내도록 관객을 이끈다. 부채를 작게 움직이면 잔잔한 바람이, 크게 흔들면 거센 눈보라가 객석에서 일어난다.
부채의 움직임이 지휘봉이 되고 객석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음향 장치가 되는 순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참여가 단순한 흥미 유발에 그치지 않는다는 .이다. 작품에서 눈보라는 주인공들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중요한 환경이다. 관객이 만들어내는 바람 소리는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는 효과음이면서 동시에 극적 긴장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물론 소리꾼의 신호에 따라 소리를 내는 것을 온전한 공동 창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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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관객이 직접 소리를 만들어내는 경험은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꾼다. 눈보라를 듣는 사람에서 눈보라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판소리가 소리꾼과 고수, 청중이 함께 만드는 공연예술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직관적으로 설명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말로 들려주는 이야기와 노래로 경험하는 이야기
공연을 보면서 문득 초등학교 시절 참가했던 동화구연대회가 떠올랐다.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바꾸고, 대사의 속도와 높낮이를 조절하며 이야기를 전달했던 기억이다. 관객이 웃으면 이야기가 잘 전달되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고, 반응이 없으면 무언가 어긋났음을 직감했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에게 관객의 반응은 가장 즉각적인 피드백이다. 판소리 역시 관객의 추임새와 호응 속에서 공연의 현장성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동화구연이나 연극이 아닌, 굳이 판소리라는 노래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눈, 눈, 눈>에서 그 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인물의 심리와 동물, 자연환경을 묘사하는 대목이었다.
이자람은 해설자와 바실리, 니키타뿐 아니라 두 사람이 타고 가는 말 제티를 비롯한 여러 존재를 목소리와 몸짓으로 표현한다. 소리의 높낮이와 속도, 거친 성음과 부드러운 음색이 바뀔 때마다 하나의 몸에서 서로 다른 인물과 풍경이 나타난다.
특히 고수 이준형의 북장단은 소리를 단순히 뒷받침하는 반주가 아니다. 때로는 이야기의 속도를 밀어붙이고, 때로는 소리가 머무를 여백을 만들면서 서사의 긴장을 조절한다.
판소리에서 말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아니리'가 사건의 흐름을 전달한다면, 노래로 표현하는 '창'은 그 사건의 감정을 음악적 시간 속에서 확장한다.
말로 했다면 금세 지나갔을 문장이 장단을 만나면 길게 늘어나거나 촘촘하게 압축된다. 소리꾼이 음을 꺾고 끌어내는 시김새는 단어의 의미를 넘어 인물의 감정과 상황의 질감까지 전달한다.
이것이 판소리의 독특한 표현력이다. 이야기를 노래로 전달한다는 것은 단순히 문장에 선율을 붙이는 일이 아니다. 언어의 리듬과 시간을 재구성해 관객이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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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를 비웠더니 러시아의 설원이 나타났다
오늘날 공연예술은 영상과 조명, 무대장치, 디지털 기술을 통해 더욱 정교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나 <눈, 눈, 눈>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검은 의상을 입은 소리꾼과 흰 부채, 절제된 무대의 색채는 흑백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북장단과 소리꾼의 몸짓이 더해지면 눈보라 속을 헤매는 인물과 말의 움직임이 관객의 머릿속에 그려진다.
무대 위에 눈 덮인 길을 사실적으로 만들어놓지 않았지만, 관객은 그 길을 상상한다. 거센 바람을 영상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객석에서 만들어낸 소리만으로 눈보라의 존재를 느낀다.
판소리의 소리꾼의 몸짓을 뜻하는 발림 역시 이러한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중요한 장치다. 소리꾼의 작은 손짓과 몸의 움직임은 인물의 행동과 공간의 변화를 암시한다. 부채 하나가 때로는 바람을 만들고, 때로는 이야기의 장면을 전환하는 표현 수단이 된다.
이는 단순히 무대장치를 줄인 소박한 연출이 아니다. 관객이 스스로 이미지를 완성하도록 의도적으로 여백을 남기는 방식이다.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된다.
무대를 가득 채우는 일이 반드시 예술가 혼자만의 몫은 아니다. 무엇을 비워두고, 그 빈자리에 어떻게 관객의 상상력을 초대할 것인가. <눈, 눈, 눈>은 그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을 보여준다.
톨스토이의 이야기는 왜 판소리가 되었을까
<눈, 눈, 눈>이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는 러시아 문학의 서사를 한국의 전통 음악 문법으로 풀어냈다는 .이다.
원작 <주인과 일꾼>은 돈을 벌기 위해 위험한 여정을 감행한 바실리가 죽음의 위기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이야기다. 탐욕과 두려움, 인간의 존엄과 희생이라는 주제는 19세기 러시아를 넘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이자람은 이 이야기를 판소리의 소리와 아니리, 발림, 추임새로 다시 구성했다.
판소리 다섯 바탕이 전해주는 조선시대의 이야기와 달리, 러시아의 눈보라와 상인의 욕망이라는 낯선 소재를 선택했지만 판소리 특유의 해학과 서사적 긴장감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 작품은 판소리의 동시대성이 반드시 한국적 소재나 현대적 배경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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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의 이야기도 판소리의 음악적 언어를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판소리가 오늘날의 관객에게 때때로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고사와 옛말, 당시의 생활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장단과 선율의 미묘한 차이에 익숙하지 않다면 반복되는 음악적 구조를 충분히 즐기기 어려울 수도 있다.
창작판소리는 이러한 거리감을 좁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전통의 표현 원리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이야기와 언어를 통해 관객이 판소리의 매력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다만 창작판소리가 반드시 전통판소리보다 더 발전된 형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섯 바탕의 전승과 새로운 레퍼토리의 창작은 서로 대립하는 과제가 아니라 판소리라는 예술을 지속시키는 두 축이다. <눈, 눈, 눈>은 그중 창작이 어떤 가능성을 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관객이 다시 추임새를 넣고 싶어지는 공연
이 공연에서 무엇보다 오래 남는 것은 눈보라를 만들어내던 객석의 소리다. 처음에는 다소 조심스럽게 추임새를 연습하던 관객들이 이자람의 부채 움직임에 따라 함께 바람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 소리는 단순한 효과음을 넘어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경험이 되었다.
물론 관객 참여 자체가 좋은 공연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참여를 유도하는 장치가 지나치게 강조된다면 오히려 작품의 음악적 깊이를 가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관객이 얼마나 크게 반응했는가가 아니라, 그 반응이 작품의 서사와 음악적 경험에 어떤 의미를 더했는가다.
<눈, 눈, 눈>에서 관객이 만들어낸 눈보라는 작품의 배경이자 인물들을 극한으로 몰아넣는 환경이었다. 그 소리를 직접 만들어보았기에 무대 위 인물들이 맞서는 추위와 두려움은 조금 더 가까운 감각으로 다가왔다.
이자람의 <눈, 눈, 눈>은 판소리가 과거의 이야기를 보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오늘의 관객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전통예술의 동시대성은 단순히 현대적인 소재를 선택하거나 화려한 기술을 결합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전통의 표현 문법이 오늘의 관객에게 새로운 감각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순간, 전통은 현재의 예술이 된다.
무대 위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객석에는 눈보라가 불었다. 그리고 그 눈보라 속에서 판소리가 앞으로 들려줄 새로운 이야기들을 기대하게 됐다.
겨울 한복판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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