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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신전마을 앞 도로변에 우뚝 선 노거수. 여순사건 당시를 다 지켜본 목격자다.
ⓒ 이돈삼
여순사건은 잔혹한 비극이었다. 한때는 '여순반란사건'으로 불렸다. 지금은 여순사건, 혹은 여순항쟁으로 불린다. '여수·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정부 수립 초기,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발생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기간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 1일까지. 여수·순천을 비롯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 충돌, 그리고 그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을 가리킨다.
▲ 순천 신전마을 풍경. 마을회관 옥상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 이돈삼
시작은 1948년 10월 19일 밤이었다.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에 제주4·3 진압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군인들이 거부했다. 대신 동족 살상 반대와 미군 철수를 외쳤다. 그 길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봉기군은 순천, 벌교, 구례, 남원까지 밀고 올라갔다.
곧바로 정부군이 여수를 。령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봉기군은 지리산으로 스며들었다. 이른바 빨치산이 됐다. 그 사이에서 민간인들이 무참히 짓밟혔다. 국가 공권력의 폭력 앞에 수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피해자들은 숨죽여 울어야 했다.
▲ 순전 신전마을 전경. 산속 마을이다.
ⓒ 이돈삼
▲ 순천 신전마을 입구에 우뚝 선 노거수. 마을 표지석과 함께 여순사건 설명판이 나란히 서 있다.
ⓒ 이돈삼
순천의 피해도 컸다. 호남고속국도 승주나들목에서 낙안읍성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순천시 낙안면 신전마을이 대표적이다.
1949년 어느 날,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봉기군이었다. 그들은 다리에 총상을 입은 14살 소년 문홍주(승주, 당시 쌍암면)를 던져놓고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죽어가는 아이를 외면할 순 없었다. 정성껏 치료하고 밥을 먹였다. 소년은 건강을 되찾아, 곧 마을을 떠났다. 주민들은 안도했다. 한편으론 뿌듯했다.
비극은 엉뚱한 데서 터졌다. 마을을 떠난 소년이 또래와 싸우다 경찰에 붙잡혔다. 연이어 군부대로 넘겨졌다. 소년에 대한 군인의 가혹한 취조가 이어졌다. 소년은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 다 토해냈다.
1949년 10월 8일(음력 8월 17일), 추석 직후 밤이었다. 어둠과 적막이 깔린 신전마을에 소년을 앞세운 정부군이 들이닥쳤다. 칠흑 어둠 속에서 고함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마을 앞 공터로 몰아세웠다. 군인들은 '부역자를 가리키라'며 소년을 협박했다. 덜덜 떨던 소년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년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자신을 치료해 준 사람들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퍼주던 어머니, 잠자리를 내어준 아저씨, 홍시를 건네준 어르신이었다.
▲ 순천 신전마을 텃밭. 고구마를 수확한 흔적이 남아있다.
ⓒ 이돈삼
소년의 '손가락총'에 마을 사람들은 한순간 '빨치산 부역자'가 됐다.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의 명단에 오른 것이다. 군인들은 손가락이 가리킨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비명도 잠시. 시신 위에 기름이 부어지고, 불길이 솟았다. 마을 전체가 화염과 연기에 휩싸였다. 금세 마을이 잿더미로 변했다.
32가구가 사는 마을에서, 그날 밤 22명이 목숨을 잃었다. 어린아이도 3명, 누워 있던 환자도 예외는 없었다. 죄가 있다면 그곳에 살았다는 것뿐이었다. 부상당한 소년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 따뜻한 심성이 죄였다.
그날 이후, 마을 사람들은 같은 날(음력 8월 16일) 같은 시간에 제사를 지냈다. 마을 곳곳에서 향이 피어오르고, 곡소리가 흘렀다. 마을사람들의 침묵은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주민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기는커녕 '빨갱이'이라는 굴레를 쓴 채 숨죽여 살아야만 했다. 죽은 이들을 기리는 일조차 조심스러운 나날이었다.
▲ 여순사건 유족 강질용씨. 강씨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었다.
ⓒ 이돈삼
"국가폭력이고, 민간인 학살이죠. 보호받아야 할 국가로부터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으니까요. 저는 세상에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 놓고 아픔을 드러내지 못했어요. 오히려 빨갱이 취급을 받았으니까요. 슬픔을 속으로 달래며 평생 피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유족 강질용(78)씨의 말이다.
신전마을 이야기는 도올 김용옥으로부터 세상에 알려졌다. 도올이 광복과 제주4·3, 여순항쟁 이야기를 다룬 책 <우린 너무 몰랐다>에서 신전마을의 비극을 기록한 것이다. 그날 이후 신전마을에 또 다른 이름이 붙여졌다. '추석이 없는 마을'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7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이제 그만 잊자' 하지만 누군가는 기억의 끈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투쟁을 한다. 역사는 기억하는 만큼 앞으로 나아가는 법. 철저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이 필요한 이유다. 신전마을로 향하는 마음이 아픈 역사와 진정 함께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 순천 신전마을 풍경.
ⓒ 이돈삼
▲ 폐교된 낙안초교금산분교장. 한때는 신전마을 사람들의 자부심이었다.
ⓒ 이돈삼
순천 신전마을은 산속 마을이다. 국사봉, 돛대봉, 침호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낙안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200여 년 전 순천 박씨와 진주 강씨, 목천 장씨와 김해 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띠풀과 대나무가 울창하다고 '섶바몰'로 불렸다. 한자로 바뀌면서 '섶'은 섶신(薪), '바몰'은 밭전(田) 자를 써 '신전(薪田)'이 됐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물길이 크다. 산속치고는 땅이 기름지고 농경지도 넓다. 친환경 농업단지로 지정됐다. 마을에 있던 낙안초등학교 금산분교장은 지난 1999년 폐교됐다. 마을에는 주민등록상 34세대, 실제는 27세대가 살고 있다.
▲ 순천 신전마을 앞들. 산속 마을치고 벼논이 넓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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